한국인의 국어생활 41
한국인은 잘 먹는다. 삼시 세끼는 물론이고 간식에 야식까지 먹는다. 조선시대 양반들도 하루에 5끼를 먹었다고 하니 이렇게 먹는 게 오늘날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한 끼에 먹는 양도 대단하다. 개화기 외국인이 찍은 사진에서 고봉밥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물론 당시에는 영양을 갖춘 반찬(특히 고기)을 골고루 차리기 어려웠기에 밥을 많이 먹었던 이유가 크지만 어쨌든 유독 밥그릇에 눈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저걸 정말로 다 먹었을까 싶은 의심은 유튜버들의 먹방을 보면 해결된다. 그 유전자가 어디로 갔겠나?
한국인은 먹는 것의 질도 중요하게 여긴다. (부사 '잘'에는 양과 질의 개념이 모두 들어있다.) 메뉴를 정했다면 기왕 맛집에서 먹고, 요리를 할 때는 유기농, 친환경 재료를 찾는다. 먹는 것의 종류와 방식도 다양하다. 식물은 뿌리부터 열매까지, 동물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맛있는 부위를 찾아 남김없이 먹는다. (특히 고기는 내장은 물론 뼈까지 고아서 먹는다.) 구워먹고, 삶아먹고, 볶아먹고, 비벼먹고, ... 한국인은 한 가지 재료도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며 새로운 맛을 찾는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대일 때도 한국 음식의 종류가 다양했던 것을 보면 먹는 것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국인은 먹는 것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고, 먹는 것에 진심이다. 이 마음을 한국어에서도 쉽게 찾고 확인할 수 있다. 옛날 속담에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같은 말이 있다. 한국인들은 늘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요즘 말로는 '쌀먹'이다. 잘 먹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먹부림', '먹부심', '먹요일'의 기록은 인생을 꽤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제때 끼니를 잘 챙겨 먹지 못하는 것만큼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일상의 인사말에도 먹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한국인은 "밥 먹었어?", "식사하셨어요?"는 질문이 실제로 밥을 먹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형사가 살인마로 알고 쫓았던 사람에게도 "밥은 먹고 다니냐?"고 제때 끼니를 챙기는 것을 물어볼 정도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한국인의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에는 먹는 것이 빠지지 않는다. 결혼하는 날에는 '국수를 먹고', 아기가 태어난 날에는 '미역국을 먹는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기념일을 먹는 음식으로 표현하는 이런 말에 흥미로워한다. 고급반이라면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채용, 승진이 되지 않았을 때 '물먹다'라고 하는 말도 알려 줄 수 있다. 그런데 '물(을) 먹다'는 표현은 외국인 입장에서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 밥, 빵, 라면, 국수, ... + 먹다
* 물, 술, 커피, 우유, ... + 먹다
'먹다'의 기본 의미는 '음식 따위를 입을 통하여 배 속에 들여보내다'로 목적어에 보통 음식이 놓인다. 영어 단어로는 eat에 해당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물, 술, 커피도 '먹는다'. 영어에서는 이들과 어울리려면 drink를 써야 하는데 '물을 먹다'를 그대로 바꾸면 'eat water'이니 의아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외국인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그냥 한국인의 관습이라고 하고 넘어가야 한다. 음식이든 음료든 '입을 통해 배 속으로 들어가면 에너지가 되니까' 정도를 덧붙이면 되겠다. 또 하나의 방법은 높임말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어에서 윗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할 때는 '먹다'는 '드시다(또는 잡수시다)'로 바뀐다. '드시다'는 먹다와 마시다의 높임말인데 음식과 음료에 모두 가능하다. 그러니 음료를 먹는 것은 언어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까지 됐다면 그 다음은 입을 통해 먹을 수 있는 것을 조금 더 알아보자.
* 담배, 아편, ...
* 기름, 가스, 전기, ...
요즘은 '피우다'로 쓰지만 옛날 어른들은 '담배를 먹는다'고 했다. 최근에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핍박받고 있지만 사실 담배가 처음 들어온 조선시대에는 정신을 맑게 하고 소화를 돕는 물건으로 권장되었다. 기본 의미로 보면 연기가 입을 통해 몸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또 그것이 이로웠으니 당시 한국인들이 먹다로 말한 걸 이해할 수 있겠다. 결국 고체든 액체든 기체든 입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모두 먹는다고 표현한 게 아닐까? 그러다 보니 입이 있는 동물들도 음식뿐 아니라 다른 것을 먹을 수 있다. '물 먹는 하마'는 냄새도 먹고, 습기도 먹고, 여름에는 장마까지 먹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먹는 행위에 한해서 물건들도 의인화된다. 기름을 먹는 자동차를 타던 한국인들은 이제 전기를 먹는 차를 탄다. 자동차의 주유구(注油口)와 充電口(충전구)에도 입(口)을 달아 주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어찌어찌 여기까지는 이해하겠다. 그런데 외국인의 입장에서, 아니 한국인인 내가 생각해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들을 한국인은 참 잘 먹는다.
* 겁, 귀, 골(goal), 꿈, 돈, 나이, 눈물, 뇌물, 더위, 마음, 빠꾸, 뺀찌, 사랑, 소리, 애, 욕, 이름,
일등, 짱, 챔피온, 충격, 친구, 코, 편, ...
1974년 한국 최초로 원정경기에서 타이틀을 딴 권투 선수 홍수환은 어머니와의 전화연결에서 "엄마야, 나 참피언 먹었어."라고 말했다. 훗날 그는 한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이북(以北) 분으로 항상 '먹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고, 잘 먹어서 힘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자연스레 참피언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상 생활에서도 시험이나 대회에서 일등(1등)을 먹고, 싸움에서 짱도 먹는 한국인이니 참피언을 먹었다는 말이 크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과연 이 말을 다른 외국어로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하다. 사전에서 '먹다'를 찾으면 조사 '을/를'로 목적어를 취하는 의미가 무려 15가지나 나온다. 이 분류와 정의를 자세히 기억하고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한국인은 분명히 '먹다'의 느낌과 정서를 공유한다. 그러니 가수 조용필이 꿈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고 한 노랫말이나 시인 박준이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에도 의아하기보다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는 한국인이라지만 사람까지 먹는 것을 보면 경악할 수밖에 없다. (인육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실제로도, 언어적으로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한국인은 뜻과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과 나이, 성별을 떠나서 친구를 먹는다. 친구를 사귀다, 만들다 같은 표현도 있는데 굳이 왜 친구를 먹어야 했을까? 누군가를 먹었다고 하는 말은 성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물고 빨고 핥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행위다.) 사전에도 '(속되게) 여자의 정조를 유린하다'로 나와 있는데 시대가 달라진 걸 반영한 듯 요즘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바뀌어서도 쓰인다. 그래서 관계만 즐기고 책임을 지지 않거나 연락을 끊어버리는 은어로 '먹버(먹고 버리다)'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상적으로는 '먹튀(먹고 튀다)'가 익숙하다. 이익만 챙기고 책임을 지거나 다하지 않는 경우,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언뜻 한국인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먹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겁을 먹고, 욕을 먹고, 더위를 먹고, ... 딱 봐도 먹으면 손해인데 왜 이것들까지 먹는 걸까? 나야 이유를 알 수 없다. 어쨌든 내 눈에 한국인은 좋은 거든 나쁜 거든 싫은 거든, 뭐가 됐든 일단 먹고 본다.
이런 상황이니 혹시라도 외국인에게 '먹다'를 가르쳐 주겠다고 섣불리 나서지 않기를 바란다. 행여 외국인이 한국어를 제법 잘한다고, 또 자신이 외국어에 능숙하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려면 '애먹다'를 '아이를 먹다'가 아니라고 한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사병과 함께 더위를 먹는다를 알려 주면서 추위는 먹지 않는 한국인의 편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음을 갖는 것과 내는 것과 먹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의 외국어 능력을 묻는 게 아니다. 한국어는 한국어만으로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혹시나 '맞먹다, 빼먹다, 좀먹다, 빌어먹다, 치먹다, 글러먹다, 돼먹다, 못돼먹다'에 왜 먹다가 쓰이는지 알고 있다면 제발 필자에게도 알려 주기를 바란다.
한국어 '먹다'의 하나하나에 사전적 정의를 맞추어 설명할 수는 없다. 먹는 걸 중요하게 여기고,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이니 웬만한 건 다 먹는다고 하는 게 낫다. 동사 '잊어버리다'는 한국인의 입에서는 '잊어먹다'나 '까먹다'로 바뀐다. 버리는 것까지 먹고 마는 한국인인데 못 먹을 게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