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시 십분의 비밀 (3)

한국인의 국어생활 47

by 집우주

한국어에서 숫자를 읽을 때 한자어와 고유어, 두 가지 읽기가 있다. 그중에서 단위로 사용되는 것들을 보자.


* 일(一), 십(十), 백(百), 천(千), 만(萬), 억(億), 조(兆), ...

* 하나, 열, 온, 즈믄, 골, 잘, 울, ...


앞선 글에서 살펴봤듯이 한국어에서 큰 수를 읽을 때는 보통 한자어가 사용된다. 반면에 고유어는 물건의 개수나 나이를 셀 때 '1(하나)'부터 '99(아흔아홉)'까지는 가능하지만 100 이상의 숫자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101은 '백하나'나 '백일'이지, '온하나'로 읽지 않는다.)


현대 한국어에서 '온, 즈믄, 골, 잘, 울'같은 순우리말 숫자는 '모든, 많은, 전부, 여러'이라는 의미로 몇몇 단어에 남았다. 100(백)에 해당하는 '온'은 관형사 '온-'의 형태로 '온 국민, 온 집안, 온 세상'처럼 쓸 수 있고 '온갖, 온몸'에서도 그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즈믄'은 1000(천)이다. 1999년에서 이른 바 Y2K라는 2000년으로 천의 자리의 숫자가 바뀌던 시기에는 '즈믄해'가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10000(만)에 해당하는 '골'은 '골백번(골百番)'이라는 단어에서 '여러 번'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잘'은 100000000(억)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일상 언어에 정말 많이 오르는 부사에 '잘'이 있다. 현대 국어에서 '잘'은 질(質)적인 면에서 수준이 높은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나는 양(量)의 개념도 들어있다고 본다. "잘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기까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먹는 행위에 별로 실력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한국어에는 "잘 먹는다"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말한다. '잘'이 질뿐 아니라 양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울창하다에 쓰인 한자 울(鬱)에는 '무성하다, 우거지다'라는 뜻도 있는데 1000000000000(조)를 뜻하는 '울'과 왠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한자어 숫자도 위의 경우처럼 고유어 숫자와 비슷하게 쓰인다. 백, 천, 만, 억은 아라비아 숫자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특히 사자성어에서는 한자어 숫자도 마찬가지로 '모든, 많은, 전부'의 뜻으로 쓰인다.


* 백(百)

; 백과사전(百科事典), 백전백승(百戰百勝),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화점(百貨店),

백성(百姓), 백발백중(百發百中), 오곡백과(五穀百果), 일당백(一當百), 제가백가(諸子百家)

* 천(千)

; 일사천리(一瀉千里), 일확천금(一攫千金), 천고(千古), 천리안(千里眼), 천추(千秋),

천재일우(千載一遇), 천편일률(千篇一律)

* 만(萬)

;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만감(萬感), 만국(萬國), 만년설(萬年雪), 만능(萬能), 만물(萬物),

만병통치(萬病通治), 萬歲(만세), 만수무강(萬壽無疆), 만인(萬人), 백만장자(百萬長者)

* 억(億)

; 억만금(億萬金), 억만년(億萬年), 억만장자(億萬長者)


위 단어에 쓰인 백(百)은 100이 아니다. '백화(百貨)'는 '온갖 상품', '백과(百果)'는 '모든 과일'이라고 해석해야지 물건과 과일을 세고 있으면 안 된다. 천, 만, 억도 백의 10배, 100배, 100000배로 곱하면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숫자들은 단어 안에서 '모든, 많은, 전부'의 뜻으로 봐야 한다. '천리(千里)'나 '천금(千金)'을 현재의 미터법이나 금의 가치로 환산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만년설(萬年雪)의 '만년(萬年)'은 '끝이 없는 시간, 영원하다'라는 비유다. (그러나 앞으로 기후 변화로 그렇지 못할 것이 예상된다.) 백천만사(百千萬事), 천년만년(千年萬年), 천만다행(千萬多幸), 천차만별(千差萬別), 위험천만(危險千萬) 같은 사자성어들에서는 단위가 다른 숫자를 두 개 이상 쓰면서 숫자의 크기를 강조한다.


우리는 인류 문명이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인간이 사용하는 수의 단위가 점점 커져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 따라 심지어 단어의 숫자가 바뀌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억(億)을 중국에서는 亿으로 쓰는데 고대에는 해당하는 수가 '십만'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 표현인 '억만(億萬)'이 이해가 된다. (이는 영어의 billionaire를 번역한 말일 수도 있는데 billion은 '십억'이니 '억만'과 대응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딱 잘라서 구분지을 수는 없겠지만 과거로 갈수록 인간이 사용하는 수의 단위는 큰 것부터 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송나라(宋, 960~1279년) 시대에 처음으로 중국 인구가 1억 명을 넘었는데 이런 일이 사람들에게 억이라는 단위를 일상생활에서 더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했을 거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집이 아주 많은 서울'의 만호장안(萬戶長安), '사람이 아주 많은 서울'의 십만장안(十萬長安)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만호(萬戶), 十萬(십만)에서 그 당시의 인구를 어림해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장안(長安)은 중국 한(漢)나라 때 수도 이름이다. 다른 나라 수도 이름을 가져와 우리나라 수도를 부른 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도 오래도록 있어왔다.) 물론, 큰 수의 이름과 개념은 그전부터 있었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한해서 말하는 것이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이 단어들과 관련해서 궁금한 것들이 있다. 고유어인 '많다'의 어간인 '많-'과 '만(萬)'의 소리가 같은데 단순한 우연인 건지('많다'의 옛말은 '만하(아래아)다'다.) 경상도 사투리인 '억수로'에 쓰인 '억' 자가 혹시 億(억)은 아닐지 같은 호기심이다. ('억수'는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라는 뜻인데 이 또한 수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억지를 부려 본다.)


인간이 사용하는 수의 단위가 점점 커져온 것은 글자를 통해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한자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거슬러 보자.


* 一, 十, 百, 千, 萬, 億, 兆, ...


한자는 상형문자로, 일반적으로 형태든 의미든 기초가 되는 단어들은 획수가 적다. 위 글자들을 보면 단위가 커질수록 어렵고 복잡해지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 한자이고, 간체자를 사용하는 중국에서는 조금 덜한 경향이 있다.) 위 글자들을 상대적으로 작은 '一, 十, 百, 千'과 큰 수인 '萬, 億, 兆'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萬(만)은 전갈을 뜻하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전갈이 10000이라는 숫자를 표기하게 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고, 숫자를 읽는 '만'은 있었으나 글자가 없어서 발음이 같은 萬을 차용했다는 설이 있다. 千(천)은 사람 (亻= 人)을 하나(一)로 묶은 것이다. 1000명의 사람을 세기 위해 만든 글자라고 본다면 인류의 역사에서 최소한 1000명이 모여있는 상황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나는 인간이 모여 살면서 어느 정도 문명을 이룬 모습인 군대, 부족, 마을이 떠오른다. 이 시대에서 본다면, 千은 동물이나 도구 같은 다른 힘을 빌리지 않고 인간이 물리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영역에서 쓰이는 숫자 단위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글자가 쓰인 단어들과 비교해 보면 만감(萬感), 만능(萬能), 만세(萬歲)처럼 감각이나 추상적인 영역에서 쓰이는 萬과는 분명 그 쓰임이 조금은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百(백)은 그보다 더 먼 옛날로 가야 한다. 百에 대해서는 약 100여 마리의 벌이 있는 말벌집의 모양을 그렸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기에 선뜻 고개가 끄떡여지지 않는다. 나는 앞서 白(흰 백)이 日(날 일)과 丿(삐침)의 결합으로 해에서 뻗어나오는 햇빛을 표현한 글자라고 해석했다. (<흰 것과 하얀 것에 대해 쓰다>(3)편이다.) 百을 白위에 一자를 그은 모양으로 보면 '태양이 비치는 세상을 하나로 묶는다'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하늘 아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위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어 단어에서 쓰인 백(百)이 '모든, 온갖, 전부'의 뜻으로 쓰였던 것이 바로 이해가 된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百이 비슷하게 쓰이며, 특히 중국에서는 '전혀'의 의미로 '모든 것을 부정'하는 뜻도 있다. 또 재미있게도 한국어에서는 같은 뜻을 가진 고유어 관형사 '온' 역시 100을 뜻하는 단어다.)


百이라는 글자가 쓰였던 시대를 상상해 보자. 100이라는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은 절대자(신, 왕 또는 부족장)만이 말할 수 있고 보통 사람의 생활과 경험에서는 전혀 필요가 없는 세상, 그 수가 너무 커서 일상적으로 사용할 일이 없고 한 개인이 백 살까지 산다는 것을 꿈조차 꿔 보지 못할 시대, 무리의 규모로 본다면 기껏 수십 명의 가족이 모여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손가락으로 세다가 모자라면 발가락 수를 더하고, 조금 더 해 보다가 곧 흥미를 잃고(또는 포기하고) 그 이상은 '많다'라는 뜻의 각자의 단어로 말했을 사람들, 이제 막 숫자를 세고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우리의 먼 조상들이다.



** 참고 **

싱글생글. [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雅言覺非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0608167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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