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46
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1991년으로 날아가
한창 잘 나가던 삼십 대의 우리 아버지를 만나 이 말만은 전할거야
아버지 6년 후에 우리나라 망해요
사업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요
차라리 잠실쪽에 아파트나 판교쪽에 땅을 사요
이 말만은 전할거야
-《타임머신》강백수
노랫말에 올라타 대한민국의 1991년으로 왔다. 강백수는 곧 IMF사태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으니 사업을 열심히 하지 말고 차라리 부동산에 투자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아버지를 만나러 갈 것이다. (이 노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1절 가사를 들으면 웃음이 픽 나오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2절로 넘어가면 바로 숙연해지게 된다.) 어쨌든 저마다 지난날의 경험과 기억이 다 다르니 각자의 91년을 추억하길 바란다. (물론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겠다.)
내가 그의 노래를 따라 30여 년 전으로 온 건 그가 아버지에게 부동산 투자를 제안하려고 했던 이유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다. (뭐, 사실 이런 걸 확인하기 위해 타임머신까지 탈 필요는 없다. 돈 낭비고 환경파괴다.) 어쨌든 이렇게 왔으니 부동산에 들러 그가 말한 아파트 시세를 보자. 잠실을 비롯한 새로 개발되던 강남 일대의 30평형 아파트가 1억 초반 ~ 2억 중반 정도다. 웬만한 회사의 직장인 한 달 월급이 100만 원도 안 되었으니 언감생심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지만, 열심히 돈을 모으고 관심을 가졌다면 집 한 채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예금이자도 쏠쏠했다. 또 1등 당첨금액이 1억 5천만원인 주택복권에 당첨되기라도 한다면 '내 집 마련의 꿈'을 바로 이룰 수 있었다.) 그 잠실의 아파트 가격이 10년, 20년, 30년 후에 몇 배가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노래가 발표된 2013년에도 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아 있었고, 2022년 현재까지도 고공행진을 하고 있으니 강백수가 타임머신을 타고서 삼십 대의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이해가 된다.
집 이야기만 하면 아쉬움과 후회로 할 말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런 건 소주 한잔하면서 하기로 하고, 이제 글의 주제인 한국어의 숫자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10억이 비교적 최근에야 한국인의 입에 오르게 된 숫자라고 본다. 앞서 살펴봤듯이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가격은 1~2억 원이었고, 당시에 10억 원 이상의 주택이나 아파트는 거의 없었기에 살아가는 데 가장 많은 목돈이 쓰이는 주거를 구입하는 데 쓰는 숫자는 기껏해야 억 단위였을 것이다. (물론 정치권의 선거자금, 부동산 투자금 등에는 십억, 백억 단위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스타급 연예인의 광고 모델료나 프로 스포츠 선수 몸값이 막 1억을 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런 상황은 한국인의 쓰는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언론에서, 또 한국인이 즐겨 쓰는 표현에 '억(億) 소리 나다'가 있었다. 이는 앞서 살펴봤듯이 집값, 몸값 등에서 억 단위의 숫자가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었다. 갑자기 몹시 놀라거나 쓰러질 때 나는 소리를 쓴 '억'과 숫자 단위인 억(億)을 연결해 '억(億) 소리에 억! 하고 놀랐다' 같은 말이 코미디에서 농담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제 보니 '등골 브레이커'와 맥이 비슷한 표현인 것 같다.)
하지만 요즘에 나는 이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사실 마지막으로 들은 게 까마득할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억(億) 소리, 일억 단위의 금액에 놀라는 한국인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1억이라도 1991년과 2022년의 가치와 평가, 사람들이 체감하는 돈의 무게와 감각은 완전히 다르다. 불과 30년 만에 한국인이 일상적으로 감각하는 가장 높은 숫자가 쉼표가 하나 더 필요한 단위로 바뀐 것이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이제 농담이 통하지 않는다. "십억 소리에 놀랐다"는 표현은 납득이 안 간다. 언어유희, 말 장난에는 상식선에서 통용되는 논리와 라임(rhyme)이 필수다.
이제 한국어의 숫자 단위를 살펴보자.
* 일, 십, 백, 천, 일만, 십만, 백만, 천만, 일억, 십억, 백억, 천억, 일조, 십조, 백조, 천조, 일경, ...
나는 지금까지의 일상대화에서 일경이라는 숫자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사실 이 이상의 숫자는 영(0)이 몇 개인지, 콤마(쉼표)가 몇 개인지 어림셈도 잘 되지 않는다. 그 아래 단위인 천조는 국방비에 1,000조 원을 써서 천조국(千兆國)이라고 불린다는 미국의 비공식 별명에서, 나머지 조 단위는 근래 대한민국의 예산인 600조, 50조 등에서 봤을 뿐, 이 역시 개인의 입장에서 별로 쓸 일도 다룰 일도 없는 숫자다. 사실 억 단위도 앞서 말한 부동산 가격, 기업의 재무제표, 스포츠 스타들의 몸값이 아니면 들리지 않는다. 그나마 만 단위 이상의 숫자가 일상의 언어에서 사장 많이 쓰이는 건 돈을 셀 때다. 한국인 중에 매일 13,798,000,000년의 우주 나이나 4,543,000,000년의 지구 나이를 세는 사람은 없다. 약 100,000,000,000,000개에 이르는 인간 세포수나 1,000,000,000분의 1m인 나노미터(nanometer)나 7,934,635,960명의 세계 인구나 51,610,695명의 대한민국 인구의 숫자를 일상 대화에 매일 올리는 사람은 없다. 43,252,003,274,489,856,000의 루빅스 큐브나 완전히 다르게 두른 바둑이나 체스 게임의 경우의 수를 세는 사람도 없다.
앞으로 인류가 알아가게 될 우주와 양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 큰 숫자가 필요하겠지만, 인간 사회로 한정했을 때, 인간의 언어에서 높은 단위의 숫자까지 자주 익숙하게 쓰이는 건 돈이 거의 유일하다. 우리는 앞서 불과 30년 만에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장 높은 숫자가 다음 단위로 바뀐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더 거슬러 인간이 본격적으로 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대에서 그 단위는 천만, 백만, 십만, 일만으로 낮아질 것이다. (1991년에 최고 당첨금액이 1억 5천만 원이었던 주택복권은 1969년에 처음 발행되었는데 판매가격은 장당 100원, 최고당첨금액은 300만 원이었다.) 그보다 더 먼 옛날로, 문명의 초기 또 인류가 처음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로 간다면 더 가장 작은 단위가 그들이 쓰는 숫자의 전부였을 것이다. 머릿속에 만, 천, 백, 십, 일이 들어있는 한국어 단어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