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45
휴대폰에 있는 디지털 시계가 주머니 속에 들어온 이후로 언제 어디서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바늘이 움직이는 시계를 사용한다. 특히 아날로그 방식의 손목시계는 시간을 알기 위한 목적만으로 차고 다니지 않는다. 기내 면세품에서 많이 보아왔던 시계들을 광고에서 보면, 거의 모두 10시 10분에 멈춰 있다. 시침과 분침이 이렇게 놓여 있는 데 대한 다양한 썰이 있지만 내가 볼 때는 숫자 12 아래에 있는 상표를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초침은 보통 35초에 있는데 세 개의 바늘이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다.)
광고에 나오는 아날로그 시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이번 주제의 제목을 <10시 10분의 비밀>이라고 지었는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다. 정말로 궁금하고 풀고 싶은 질문은 한국인은 왜 같은 숫자인 10을 시는 ‘열’로, 분은 ‘십’으로 읽느냐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한국어에 숫자를 읽는 방법이 아래와 같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 , 스물, ... , 서른, ... , 마흔, ... , 쉰, ...
*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 이십, ... , 삼십, ... , 사십, ... , 오십, ...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이렇게 짚어봐야 한다고 말하는 게 민망하고 또 미안하다. 잘 알다시피 하나는 순우리말인 고유어, 다른 하나는 한자어다. 이 둘의 사용 용도는 다르기에 한국어에서 이 둘을 문장과 상황에 맞게 알맞은 쪽으로 잘 골라서 사용해야 한다.
* 010-1234-5678, 2022년 4월 2일, 2×2=4, 3병에 5000원, 19 살/세, 1 사람/명,
* 2번 버스를 탔어요
* 3달 - 3월 - 3개월
한자어는 보통 버스, 좌석, 핸드폰 등 번호에 쓰인 숫자를 읽을 때 사용된다. 달력의 날짜, 수학에서 쓰는 숫자, 돈을 셀 때도 한자어 숫자로 읽는다. '둘둘은넷'으로 시작해 '아홉아홉여든하나'로 끝나는 구구단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이러면 ‘구구단’이라는 이름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수를 셀 때는 고유어로 읽는다. 이때는 보통 단위명사가 함께 쓰이는데 '하나>한, 둘>두, 셋>세, 넷>네, 스물>스무'에서 보듯 받침의 탈락 같은 불규칙한 문법까지 알아야 한다. 또 단위명사가 고유어인지 한자어인지에 따라 읽는 방법이 결정되기도 한다. '열아홉 살'과 '십구 세'에서 보듯이 한국어에서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어울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이 '사람'을 뜻한다고 해도 한자 '명(名)'을 쓸 때 '일 명'이라고 하지 않듯이 100%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2번 버스를 탔어요'라는 문장처럼 '이'로 읽는지 '두(둘)'로 읽는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입장에서 숫자 읽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왜 병을 셀 때는 고유어, 돈을 셀 때는 한자어로 읽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외우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고유어와 한자어로 숫자를 바꿔서 읽으면 한국인은 바로 알아차리겠지만 외국인은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알아채지 못할 수 있다.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흔하며, 지적하면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계속되는 실수에 스스로에게 느끼는 자책감에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화를 겨우겨우 누그러뜨리는 상황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출연한 유튜브 동영상에서도, 오래도록 ‘삼 개월’을 ‘세 개월’로 읽는 실수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3월'을 ‘삼월’이 아닌 ‘세 월’로 읽으면 뜻이 완전히 다른 단어가 된다.)
어쨌든 외국인들은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숫자를 한국어로 읽으며 일상대화를 하기 위해서 다른 언어의 두 배에 해당하는 단어를 익혀야 한다. 심지어 둘의 글자와 발음에는 그 어떤 공통점이나 유사성도 없지 않은가? 이는 분명히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아랍어 등등 여타의 언어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한국어만의 특징이다. (물론 우리와 언어적으로 가까운 일본어에도 숫자를 읽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역시 일본어 고유의 방식과 한자어이다.)
어쨌든 다시 시계로 고개를 돌려보자.
* 7:07 / 11:11 / 15:15
계속해서 시계에 신경이 쓰이는 건 시간에 써 있는 숫자를 읽을 때 고유어와 한자어 읽기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어에서 '○○:○○'로 표기된 시간은 '○○시 ○○분'으로 읽는데 이미 말했듯이 시는 고유어, 분은 한자어 숫자로 읽어야 한다. 이를 규칙으로 적용해서 숫자만 바꾸면 될 것 같지만 이는 언어를 배우는 입장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영어 문장 구조를 놓고 단어만 바꿔 넣는다고 해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7:07을 보고 한국인은 자연스럽게 '일곱 시 칠 분'이 떠오르겠지만 왜 '칠 시 일곱 분, 칠 시 칠 분, 일곱 시 일곱 분'으로 읽으면 안 되는지 설명할 수 있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일곱 분'은 윗사람을 센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칠 시'를 무조건 틀렸다고 보기도 애매한 것 같다. 15:15은 보통 '오후'를 병기하거나 생략하여 '세 시 십오 분'으로 읽는데 몇몇 사람들은 '열다섯 시' 또 '십오 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경계근무시간을 이렇게 말했다.)
이러니 외국인들에게 시간이라는 하나의 개념 안에서 여러 숫자읽기가 사용되는 것은 차원이 완전히 달라지는 문제다. 11:11에서 '열하나'와 '십일'이라는 전혀 다른 단어를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일본어에도 숫자를 읽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지만 시와 분을 다르게 읽지는 않는다. (일본어로 11時 11分인데 둘 다 '11(じゅういち[쥬이치])'로 읽는다.) 만약 이를 영어로 읽는다면 '일레븐 일레븐(eleven eleven)'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는 eleven이라는 한 단어를 반복하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쉽고 간단한 방식이다. (반면 시와 분의 숫자 읽기가 다른 한국어에서는 애초에 반복이 가능하지 않으니 일리네어 레코즈의 가사처럼 '일레븐 일레븐' 뒤에 '빈 라덴 빈 라덴'을 붙인 라임(rhyme)을 만들어내는 작업도 쉽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왜 한국어는, 한국인은 왜 이러는 걸까? 물론 이번에도 나는 답을 모른다. 하지만 관련해서 또 그럴듯하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기왕 이렇게 된 거 한국어의 숫자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필요할 것 같다. 마티의 드로리언(DeLorean)이든 닥터의 타디스(TARDIS)든 일단 올라타자. 과학을 좋아한다면 소티(SOTI)도 괜찮고(과연 칼 세이건과 닐 타이슨 중에 누가 있을까?), TV만화를 기억한다면 "돈데기리기리~" 주문을 외워보자. 다만 어쩌면 꽤 옛날보다 더 먼 옛날로, 인류의 역사를 훑어야 할지도 모르기에 시간을 되돌리는 게 기껏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만 가능한 마코토의 점프를 따라하거나 어두운 공간으로 팀을 따라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 어차피 갈 곳은 정해져 있고, 처음부터 너무 먼 과거에 갈 이유는 없으니까 강백수의 <타임머신>을 타고 1990년대 대한민국으로 가는 게 딱 좋을 것 같다.
유튜브. 어썸코리아. <외국인이 한국어 숫자 배울때 멘붕오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