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48
우리는 지금 인간이 100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에 있다. 여기에서 만난 우리 조상들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더해 기껏 10~20 정도를 세는 것밖에 할 줄 모르고, 그 이상의 십 단위의 수는 포기하고 만다. 이때의 사람들에게는 100은 알지도 못하고, 수의 개념이 있다 한들 평소에 셀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다. 이들에게 100은 어마어마하게 큰 수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확인을 위해 그보다 작은 단위의 숫자를 알아보자.
*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
1부터 10까지의 한자다. 막대기(一)가 한 개 있으면 1, 두 개면 2, 세 개면 3이 되는 식이다. (이는 로마 숫자 표기인 Ⅰ,Ⅱ, Ⅲ과도 닮아있는데 동서양의 가로세로 방향만 다른 것이 재미있다.) 十(십)은 갑골문에는 막대기를 세운 것(丨)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丨(뚫을 곤)은 中, 串 같은 한자에서 보이듯 '뚫다, 관통하다'는 뜻이 있으니 일의 자리(一)의 수를 하나로 꿰어낸 묶음이 곧 10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역시 10을 뜻하는 로마 숫자 Ⅹ와 각이 틀어져 있다. 한국어에서는 잘 쓰이지 않지만 십(十)을 여러 번 더한 '스물입(卄), 서른삽(卅), 마흔십(卌)'같은 한자도 있고, 홍콩에서는 20을 뜻하는 글자로 廿을 쓴다.)
한국어에서 위의 한자가 쓰인 단어나 사자성어를 찾아보자.
* 일석이조(一石二鳥), 이삼기덕(二三其德), 이팔청춘(二八靑春), 삼일천하(三日天下),
조삼모사(朝三暮四), 사면초가(四面楚歌), 삼삼오오(三三五五), 십중팔구(十中八九),...
* 권불십년(權不十年), 문일지십(聞一知十), 시방세계(十方世界), 십년지기(十年知己),
십자가(十字架), 십장생(十長生),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위에서 쓰인 한자어 숫자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는 그에 해당하는 1~9를 가리킨다. 이삼기덕(二三其德)은 <시경(詩經)>의 맹(氓)에 나오는 어구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숫자로 갈팡질질팡하는 사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다. 단위가 달라지는 수인 십(十)조차 앞서 알아본 百(백), 千(천), 萬(만)처럼 '모든, 많은, 전부'의 뜻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숫자와 호응하는 단어에 따라서 사면초가(四面楚歌), 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는 '모든'으로, 십년(十年)은 '아주 오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들 숫자는 1~99까지의 수를 표기하는 데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현상을 보다가 문득 '던바의 수(Dunbar's number)'가 떠올랐다. 이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로빈 던바(Robin Dunbar) 교수가 제안한 '개인이 사회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다. 그는 대뇌와 영장류 집단의 상관관계를 연구하여 한 사람이 동시에 인간 관계를 계속 관리할 수 있는 숫자는 최대 '150명'이라고 발표하였다. (100~250명 사이로 제안되었고 평균적으로 150이라고 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서 팔로워 수가 천, 만 명이 되고, 유튜브 구독자 수가 백만을 넘기는 요즘 같은 세상에 150명이라니, 현대인의 인간 관계를 너무 작게 보는 것은 아닌가?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인스타그램은 팔로워는 무려 2억 1,500만 명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숫자와 주장에 반박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는 던바의 수가 꽤 그럴 듯했다. (연구자가 아니어서 대뇌 신피질 크기와 숫자의 상관/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가 제시한 숫자에 동의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150명은 나에게도 많은 사람이고 큰 수다. 던바 교수가 말한 대로 공항 라운지에서 만났을 때 어색해 하지 않고 인사할 정도로 친숙한 사람, 초대받지 않은 술자리에서 우연히 동석해도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의미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그 정도일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많은 사람과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한다고 해도 천 단위를 넘기는 사람이 있을까?) 특히 내 눈길이 가는 대목은 그가 제시한 근거 사례였다. 던바 교수는 현대 군대에서 전투부대의 기본 단위인 중대가 130~150명으로 구성돼 있고, 11세기 영국 마을의 크기가 평균 160명이었던 점, 기원전 6000년 집단거주 마을 크기가 120~150명이었던 사실을 들어 주장을 보충한다. 아마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도착해 머물고 있는 이 시대, 아직 100이라는 숫자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우리 조상들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는 기원전 6000년보다 더 먼 시기로 추정된다.
100은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오랫동안 '매우 큰 수'였다. 이를 '백(百)'이라는 한자와 '온'이라는 고유어 숫자의 쓰임에서, 또 그보다 작은 단위의 숫자를 통해서 확인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일, 십 단위까지의 수가 인간의 생활에서 훨씬 더 많이, 더 오랫동안 쓰여왔다. (이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단위의 수를 일상에서 사용하게 된 오늘날에도 해당된다.) 언젠가 한국인은 100부터 큰 단위의 수를 전부 한자어로 바꾸었다. 아마도 문자를 먼저 발명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중국 한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인이 수를 세는 말과 글에는 '하나'부터 '아흔아홉'까지는 고유어가 그대로 남았다.
** 참고 **
한겨레. <“친구 한도는 150명” “더 많다”…‘던바의 수’ 두고 공방>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96109.html#csidx66b755b9d77ea5791ca52908dceff5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