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50
10:10을 '열시 열분', '십시 십분'으로 읽고 나서 멘붕에 빠진다.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외국인들은 한국어로 시간을 읽을 때면 어김없이 고개를 떨구거나 얼굴이 빨개진다. 그래서 고유어와 한자어 읽기 두 가지 방법을 비슷한 시기인 초급반에서 다루지만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정확히는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수업을 계속 듣게 하기 위해서) 순서를 정하고 같은 시간에 둘을 한꺼번에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간 읽기는 이 두 가지 읽기를 모두 배우고 난 다음, 마지막에야 가르칠 수 있다.
당연히 한자어가 먼저다.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번호나 숫자를 읽을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휴대폰번호, 버스 번호, 지하철 노선, 가격(화폐 단위), 주소(건물의 층, 동, 호수 등)를 말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한국에서의 생활과 기초적인 언어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일이삼'은 1부터 10까지 모두 한 음절이어서 외우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20, 300 같은 숫자도 글자상으로 '2+0'는 '이+십', '3+00'은 '삼+백'처럼 간단히 적용할 수 있는 구조인 데다가 한국인들은 경우에 따라서 1234를 '천이백삼십사'가 아닌 '일이삼사'로 읽는 데서 보이듯 세네 자리 수만 되어도 숫자를 따로 읽기도 한다. (반면 고유어는 '스물, 서른'처럼 각각의 이름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한, 둘>두, 스물>스무' 같은 형태의 변화까지 알아야 한다.)
한자어 숫자 읽기가 중요하고 필요한 또 하나는 날짜다. '2022년 5월 7일'은 '이천이십이년 오월 칠일'로 읽는다. 오늘 날짜나 약속, 생일 같은 기념일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당연히 한자어 숫자 읽기를 할 때 날짜를 읽는 법을 가장 많이 다루고 연습한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라도, 또는 재미삼아서라도 이를 고유어 숫자인 '하나둘셋'으로 바꿔 보자고 하면 안 된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우선 2022라는 숫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고, (천 단위로 '즈믄'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다.) 7일의 경우에는 '이레날'이라는 순우리말 이름도 있기에 단순히 숫자만 바꾸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인도 아주 오래 전부터 날짜를 세고 말해왔을 텐데, 왜 날짜의 숫자를 고유어로 읽지 않을까 의문이 든다. 년이야 숫자가 천 단위라 그렇다 치더라도 월이나 일은 1부터 기껏 12, 31까지의 숫자만 사용되기에 앞서 말했듯이 '하나~서른'까지의 고유어 숫자가 더 익숙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이레날'에서 봤듯이 '하룻날, 이튿날, 사흗날' 등 날짜를 가리키는 순우리말도 있지 않은가?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어에서 날짜에 숫자가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양력(陽曆)을 사용한 후부터다. (고종은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공표하며 양력을 도입했다.) 그전에는 壬寅年 乙巳月 庚申日(임인년 을사원 경신일)처럼 음력간지(陰曆干支)로 날짜를 말했다. (임진왜란, 갑오개혁 등에서 쉽게 그 사용예시를 찾을 수 있다. 현재에는 사주를 볼 때 음력간지를 사용한다.)
이처럼 오래도록 한반도에서 농경생활을 해 온 한국인은 음력을 사용했기에 년도나 날짜에 숫자를 붙여 말할 일이 없었고, 숫자를 사용하는 양력 날짜는 근대에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이다. 그런데 찾아 보면 근현대에 한국으로 들어오거나 생겨난 문물의 경우, 고유어보다는 한자어 숫자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옛날에 돈을 셀 때 쓰던 푼, 냥 같은 단위에는 '한 푼, 두 냥'처럼 고유어 숫자로 말하고 그런 표현이 현재도 관용어로 남아있지만 20세기 초반에 쓰이던 圓(원)이나 錢(전) 같은 경우에는 '일 원, 이 전'처럼 한자어 숫자로 읽는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는 화폐 단위인 '원'은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한글로만 쓴다.) 언어적으로는 한자끼리 어울려 쓰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이름을 짓거나 들여올 때 한자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한자뿐 아니라 중국, 일본 한자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날짜를 표기하는 年(년), 月(월), 日(일) 같은 한자에도 숫자를 쓸 때 '일, 이, 삼, ...'의 한자어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 천 단위가 넘는 년도에는 음절이 짧다는 장점도 있는데 굳이 고유어 숫자를 붙이는 게 더 억지로 느껴진다.
이제 날짜에서 하나 더 들어가 시간을 읽어보자. 오늘날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상에서 시, 분, 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살아가는 것은 시계가 보편적인 물건이 되었기에 생겨난 것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처음 철도가 생기면서 기차로 출퇴근하는 문화가 생겼고, 그에 따라 지역간 시차를 보정하기 위해 시계가 필요해졌고 대중화되었다.) 그전에 보통의 한국인들은 꽤 오랫동안 12진각법(十二辰刻法)을 사용했는데 이는 스물네 시간의 하루를 열두 개로 나누어, 하나의 간격이 오늘날의 두 시간에 해당한다. (누군가는 두 배 차이가 나는 시간에 대한 감각 차이가 약속시간에 꼭 조금씩 늦는 이른바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이 생겨난 이유라고 한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자시, 축시, 인시, ... , 술시, 해시'처럼 시간의 이름에 숫자가 사용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분, 초는 아예 없었다. (물론 과학적으로 시간을 재는 단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일상 언어에서 쓰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주를 볼 때도 분, 초를 말하지는 않는다. 태어난 시(時)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인데 시계도 없는 상황에서 분, 초를 알 수는 없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중요했던 인류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에서 분, 초 같은 짧은 길이의 시간을 셀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時), 분(分), 초(秒) 역시 한자다. 그러니 시간을 가리키는 10:10:10을 '십시 십분 십초'로 읽는 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이는 틀렸다. 셋 중에 하나만 다른 방법을 써야 하니, 애초에 시간 읽기가 이상하고 궁금했다면 '왜 시만 고유어로 읽느냐'고 질문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질문, 이 비밀에 대해서는 나는 이미 답을 했다. 하나, 둘, 셋으로 숫자를 고유어로만 읽는 게 연속적으로 가능한 것은 '하나'부터 '열아홉'까지다. 분과 초는 0~59의 숫자를 쓰기 때문에 이 범위 바깥에 있다. 그러니 언어적으로도, 관습적으로도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고유어로 읽지 않는다. 시는 0~24까지 숫자를 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를 반으로 나누고 오전, 오후를 붙여서 1~12만 써도 표현이 가능하다. (서양에서도 A.M.과 P.M.을 사용해서 똑같이 사용한다.) 이는 앞서 살펴본 1~19의 숫자 범위 안에 들어온다. 이것은 한국인이 아주 오래도록 자주 사용해 온, 작은 숫자인 것이다. 국립국어원의 답변을 빌리면 '관용적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 시(時)는 한자어이긴 하지만 분, 초와 다르게 오래도록 써 온 글자여서 한글처럼 인식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사람을 세는 단위인 명(名)이 좋은 예다.)
프랑스 바스크(Basque) 지역에서는 독특한 20진법을 쓴다고 한다. 바스크어로 10을 hamar, 20을 hogei인데 30은 20에 10을 더한 hogeita humar다. 이는 40(berrogei), 50(berrogeita humar)처럼 다음 숫자에도 같은 패턴으로 반복된다. 프랑스의 서쪽 브르타뉴(Breizh) 지방의 브르통어(Brezhoneg)는 프랑스어와 전혀 연관성이 없는데 여기도 숫자가 독특하다. ugent가 20인데 daou-ugent로 표시하면 2×20으로 40을, tri-ugent는 3×20으로 60을 말한다. 심지어 70은 dek ha tri-ugent로 '10 그리고 3×20'이다. 만약 한국인이 이런 언어를 배울 때, 저 언어가 잘못됐다거나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렵고 복잡하지만 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말하고 듣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시간 읽기도 마찬가지다. 마치 대단한 비밀을 파헤치는 것처럼 했지만 오래도록 한국인의 입과 귀에 새겨진 것은 결국 '원래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참고 **
한겨레. <5시 5분은 왜 다섯시 다섯분으로 쓰지 않나요?>
https://h21.hani.co.kr/arti/reader/together/29950.htm
블로그. <pola's univers>
https://polaslanguages.tistory.com/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