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이 되어버린 첫 글자 사랑 (1)

한국인의 국어생활 38

by 집우주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는 라이벌로 유명하다. (가나다 순으로 썼다. 이하 상황에 따라 '고대', '연대'로 줄여서 쓰겠다.) 두 학교는 매년 야구, 농구, 럭비 등 실력을 겨루는 대학교 정기전을 벌인다. 1926년 보성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각각 현 고려대와 연세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유서 깊은 이 행사의 꽃은 학생응원전이다. '입실렌티'와 '아카라카'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라이벌 응원전은 그 자체로 두 학교 학생들의 자부심이자 타학교 학생들 또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의 선망이기도 하다. (코로나로 인해 2020년부터 응원전을 포함한 뒤풀이 행사인 '기차놀이'까지 모든 대면활동을 취소했고, 온라인 응원전과 e스포츠 대회로 대체했다.)


정기전의 명칭은 고연전 또는 연고전이다. 공식적으로는 홀수해에 고연전, 짝수해에 연고전이지만 해당 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입에서는 당연히 '우리 학교' 이름이 먼저다. 고려대학생은 언제나 '고연'이고, 연세대학생의 입에서는 '연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와 관련한 우스갯소리가 많다. 아주 오래 전부터 떠돌던 말 중 하나는 고대생들은 약국에서 연고(軟膏)가 아닌 '고연'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비교적 최근글로도 올라와 있고, 거기에 "감히 연고라니... 이런 고연 놈이 있나?"라는 댓글까지 달린 걸 보니 이 썰렁한 유머는 세월이 한참 흘러도 망령처럼 캠퍼스를 떠돌며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 연대생들도 결코 만만치 않다. 요즘에는 두 학교 학생들이 유튜브에 영상 콘텐츠를 제작해 올리는데 두 학교 학생이 출연해 말싸움을 하는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다. 고대생이 상위권 대학교를 스카이(SKY)로 부르고, 이를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순이라고 하자 연대생이 "S-서울대, K-그리고, Y-연세대."라며 반박한다. 순서를 바꾸기 위해 대학교 이름을 접속사로 바꾸어버리는 황당하고 신박한 해석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처럼 순서는 중요하다. 순서에는 보통 가치 판단에 따른 우선 순위, 중요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포티파이(Spotify)는 '앨범 셔플 재생' 버튼을 제거했다. 앨범에 실린 음악을 아티스트가 고민해서 고른 순서대로 들어주기를 바라는 가수 아델(Adele)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크레디트 순서에 예민하다. 역할의 중요도, 노출 빈도, 나이, 데뷔 순 등을 고려해 순서가 정해지지만 이 때문에 다툼이 생기거나 배우가 하차하는 일도 종종 있다. 먼 이야기가 아닌 비근한 예로는 내가 참여하는 모임에서 순번이 정해지는 일이 있을 때, 내 이름이 초반에 불리지 않으면 서운하다. 마지막이 여러 번 반복되면 결코 우연이 아닌 의도가 있는 것이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심지어 한국인은 붕어빵을 머리부터 먹을까 꼬리부터 먹을까하는 것까지도 고민한다.


그런데 이렇게 순서에 민감한 한국인이 정말로 집착하는 건 따로 있다. 2009년 12월 경상남도의 세 도시 마산, 진해, 창원의 갈등은 극에 달해 가고 있었다. (이 또한 가나다순으로 썼다.) 세 개 시는 통합에는 찬성했지만 명칭에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창진, 진창마, 창마진, ... 이름을 두고 기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아래 당시 기사에서 각 시의 관계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들어보자.


마산시의 한 관계자는 20일 “1949년 시로 승격된 마산시는 창원(1980년), 진해(1955년)보다

시 승격이 이르다”며 “마산이 맏형 격”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창원시는 “조선시대 3개 지역을

관할하는 창원대도호부 시절이 있었다”며 “창원의 역사가 가장 깊다”고 반박했다.

반면 진해시는 “진해, 창원, 마산 모두 가야연맹체의 한 축이었다”며 “마산과 창원은 현재의 도시지만

진해는 물류와 항만, 관광 면에서 미래도시”라고 주장했다.


역사, 문화, 산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저마다의 판단이 있겠지만 결론은 '우리 시'의 이름이 맨 앞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 위 사례에서 보듯이 언어생활을 하다 보면 대등한 것들을 모아서 한 단어로 만들어야 할 경우가 있고, 한국어는 보통 단어에서 한 글자를 선택해 붙이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때 필연적으로 순서가 생기게 되는데 한국인은 반드시 자신이(또는 우리가) 첫 글자를 가지고 싶어한다. ('고연, 연고'도 정확히 말하면 순서가 아닌 첫 글자 싸움이다. 세 도시는 결국 2010년 7월 1일자로 '창원'으로 통합되었다.)


한국인은 첫 글자를 좋아한다. 또 사랑한다. 나는 한국인의 이런 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첫울음, 첫눈, 첫만남, 첫 데이트, 첫키스, ... 굳이 라디오스타 최곤의 멘트를 빌리지 않더라도 처음이라는 말처럼 설레는 단어가 있을까? 첫(처음)은 단어, 글자 자체만으로도 눈에 띈다. 하나, 둘, 셋으로 쓰이는 숫자를 순서로 바꿔보자. 나머지 숫자는 글자에 '- 번째, -째'만 붙이면 되는데 '하나'만 '한'이 아닌 '첫'으로 쓴다. 이렇게 언어적으로도 '첫'만 특별 대우를 하고 있으니 그 글자를 갖고 싶어하는 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니 한국인은 내 이름, 내가 속해 있는 것의 이름이 처음에 놓이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를 다 합쳐도 첫 글자가 아니면 성에 차지 않고, 두 번째부터는 누가 오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첫 글자, 그 한 자리를 놓고 이해당사자들끼리 지지고 볶다가 알아서 하면 그만인 말들도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아래 몇 가지 사례를 조금 더 살펴보자.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세 가지를 표현하는 말을 의식주(衣食住)라고 한다. 순우리말로 옷, 밥, 집으로 바꿔볼 수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밥이나 집이 더 중요한데 왜 옷이 맨 처음에 있을까?"라며 이 순서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검색해 보니,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따라 순서를 매긴 의견들이 있다. 중국에서는 이를 '식의주'로 쓰고 있고, 영어에서도 보통 food, clothing and shelter(식의주) 순으로 쓰는 걸 보면 외국인들도 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사들이 쓰는 말 중에 '술기'가 있다. 혹시 술과 관련된 [술끼]를 떠올렸다면 "땡". 이 단어는 '사물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을 뜻하는 기술(技術)을 뒤집은 말이다. 의사들은 사람을 치료하고 목숨을 살리는 '기술'을 '술기'라고 부른다. 술기는 사전에 등재된 정식 단어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거의 쓰이지 않지만 의사들 사이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인다. 이것이 의사들의 우월의식에서 나온 단어라며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어느 무리에서 은어처럼 자신들끼리 사용하는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언어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에 지금 이자리에서 특별히 의견을 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방식을 살펴보면, 글자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정확히는 원하는 글자를 맨 처음에 놓음으로써 자신들의 일을 일반적인 기술과 구분하려고 한 의도가 확실해 보인다. (기술의 두 한자는 '재주, 솜씨'를 나타낸다. 한자 뜻풀이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상대적으로 技(기)는 단순하고 術(술)은 복잡한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일부 페미니스트가 쓰고 있는 단어인 '모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가리키는 단어 부모(父母)가 부계중심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단어이니 모계중심의 사회로 전환을 외치는 입장에서 글자의 순서를 바꾸자는 것이다. 아울러 오랜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또 상대적으로 낮았던 여성의 지위를 올리자는 관점에서 母를 첫 글자로 놓고 싶은 것이다. 사회구성원의 약속과 시대에 따라 단어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에 훗날 우리 사회가 이를 일상 용어로서 받아들이기로 합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주제에 맞춰 내가 중요하게 보는 지점은 찬성과 반대의 여부가 아니라 어느 시대든 말을 만드는 개인 또는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단어의 첫 글자로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첫 글자 사랑은 유별나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사랑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집착의 행태를 많이 본다. 물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것이 집착이 아니라고 할 것이고, 또한 사랑과 집착을 객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관찰자의 시점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어쨌든 나는 매우 지나친 상태를 지적하는 것인데 내 시점에서는 첫 글자가 가장 특별하다는 생각과 첫 글자를 차지하려는 한국인의 사랑이 거의 모든 경우에 집착으로 느껴진다. 나는 너무나 사랑해서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사랑이라고 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생각도 없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

유튜브. 낄낄상회. [몰카] ENG CN) 연세대 vs 고려대 학생이 부랄친구라니 ㅋㅋ 이건 정치 종교 보다 위험한 주제다!! 다들 엎드려 빵 터진다 ㅋㅋㅋ 신촌 카페 아수라장 ㅋㅋㅋ

https://www.youtube.com/watch?v=dvnfQiGhS64

경향신문. 마창진? 창마진? 진창마? 산해원? 통합시 명칭 갈등

https://m.khan.co.kr/local/Yeongnam/article/200912201733535#c2b

한국경제. [이건 왜?] 의식주…음식보다 옷이 중요한 까닭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08112056091

의협신문. 사전에 없는 '술기','기전'... 계속 써야 할까?
https://www.doctor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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