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이 되어버린 첫 글자 사랑 (2)

한국인의 국어생활 39

by 집우주

2002년 월드컵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함께 열렸다. 피파(FIFA)는 사상 전례없는 공동개최로 이제껏 한번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공식명칭을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Korea Japan'과 'Japan Korea' 중에서 어느 쪽으로 하든 반발과 논란이 생길 게 뻔하기 때문이다. 월드컵 같은 국제행사는 보통 개최연도와 국가명이 함께 기억되기 때문에 특히 예민하다. 결국 예민한 순서 문제를 피하기 위해 대회의 공식명칭은 국가명을 뺀 '2002 피파 월드컵(FIFA World Cup)'이으로, 각 나라에서는 자국의 이름을 앞에 놓은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피파의 규정을 떠나 당연히 한국인은 붉은 물결로 뜨거웠던 그해 여름을 '한일월드컵'으로, 일본인은 '일한월드컵(日韓ワールドカップ[니칸와루도카푸])'으로 부른다.


아무리 두 나라가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미워해도 상대가 자국의 이름을 처음에 놓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과 일본, 둘만 따질 때는 각자가 '우리 나라'를 첫 글자에 놓으면 되기에 오히려 순서가 크게 문제될 일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 중국까지 포함해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를 불러야하면 조금 복잡해진다. 한국인인 우리는 당연히 '한'을 맨 처음에 놓을 것이다. 그 다음은? 민감한 순서를 정할 때는 명분을 구해야 한다. 만약 3국이 참가하는 행사에 쓰는 명칭이라면, 보통 주최국을 맨 처음에 놓고 주빈국, 기존 관례, 행사 개최 순번 등을 고려해 나머지 국가의 순서를 정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공식 행사가 아닌 일상적인 상황, 일반인인 나 같은 사람이 말할 때도 '한중일'이냐 '한일중'이냐의 순서는 꽤 중요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처럼 국가명을 다룰 때에는 역사, 문화, 국민 정서, 나아가 개인 감정까지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언어생활에서 이런 경우를 자주 마주하다 보니, 한국인은 순서에 극도로 예민하다. 그런데 순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꼭 한국인만의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볼 때 한국인은 유독 순서에 더 민감하고, 나아가 이것이 첫 글자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을 더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 글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을 한국어와 영어의 비교를 통해서 찾아보려고 한다.


우선, 한글과 알파벳(영어)으로 단어를 만드는 방식을 비교해 보자.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고려대-연세대'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의 두 대학교인 '옥스포드대학(University of Oxford)'와 '케임브리지대학(University of Cambridge)'을 들 수 있다. 오랜 라이벌인 두 학교는 매년 조정, 럭비, 육상, 체스로 정기전을 벌이는데 두 대학을 같이 가리킬 때는 '옥스브리지(Oxbridge)' 또는 '캠포드(Camford)'라고 한다. Ox-ford와 Cam-bridge를 음절로 나누고 첫 번째 음절과 다른 단어의 나머지 음절을 결합한 것이다. (한글은 글자 하나에 자음과 모음이 있어서 한 음절로 독립적인 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알파벳은 모음이 없으면 발음할 수 없어서 한국어의 글자와 대응시키기 위해 음절 단위로 보고 있다.) 이는 첫 음절을 가져와 붙이는 '고연/연고'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과연 한국에서 '고세'나 '연려'를 인정할 수 있는 학생들이 있을까? 만약 이를 '고연/연고'처럼 첫 음절끼리 붙이면 '옥스캠(Oxcam)'이나 '캠옥스(Camox)'가 되는데 이들은 채택되지 않았다. 영어를 잘 모르는 내가 그 이유에 대해서 잘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지만, 나는 이 신조어가 단어로서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다른 예를 들어 부족한 감을 채워보면, 크루아상(croissant)과 도넛(donut)이 합쳐진 형태의 빵인 크로넛(cronut)이 괜찮겠다. 첫 음절을 조합해 만든 crodo(크로도)나 docro(도크로)는 발음과 어감은 차치하더라도, 단어의 모양 자체가 왠지 어색하고 '단어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단어를 조합하는 방식에서 두 언어는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영어 역시 한국어처럼 두문자(頭文字)를 활용한 신조어가 많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단어에 쓰인 글자의 순서와 그에 따른 첫 글자에 집착하는 경향은 한국어보다 훨씬 덜한 것 같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언어 환경에 대해서 살펴보자.


* FANG - FAANG - MAMAA

* MSN, DESK


미국의 경제방송국인 CNBC의 진행자 짐 크레이머(Jim Cramer)는 Facebook(페이스북), Amazon(아마존), Netflix(넷플릭스), Google(구글)을 묶어서 FANG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 기업 규모나 매출액 순위 등으로 글자 순서를 정했다고 생각했다. GANF, FNGA, NGAF, ... 등등 네 글자로 만들 수 있는 24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하필 FANG으로 한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fang은 '뱀, 개 등의 송곳니'를 뜻하는 단어였고, 그는 기존 단어의 글자 순서를 활용해 당시 뉴욕증시를 빛낼 핵심 종목을 꼽은 신조어를 만든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FANG에 Apple(애플)을 추가해 FAANG을 만들었다. 마지막에 추가했으니 FANGA로 할 수도 있는데 자신이 만든 단어를 활용하기 위해 모음을 중복하는 표기로 쓴 것 같다. (영어에서는 cooool, grrrrr처럼 글자를 더해서 의미나 느낌을 강조한다.)그런데 최근에 Facebook이 Meta(메타)로 기업명을 바꾸고, Microsoft(마이크로소프트)가 시가총액 1위에 오르고 Netflix가 부진하자 N(넷플릭스)이 빠지고 M(마이크로소프트)가 들어간 MAMAA(메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G(구글)이 모회사인 A(알파벳)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 역시 기존 단어 mama의 발음을 활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글자를 바꾼 것 같다.


나란히 쓰인 MSN, DESK를 보고 책상에서 메신저를 하는 장면을 떠올린 독자라면 축구 문외한이자 옛날 사람일 확률이 높다. MSN은 한때 스페인의 축구구단 FC 바르셀로나의 막강한 공격을 이끌었던 Messi(메시), Suarez(수아레스), Neymar(네이마르) 세 선수를 함께 부르는 말이다. 우연히도 세 선수의 이름의 첫 글자인 M, S, N을 연결하니 메시저 서비스로 잘 알려진 단어인 MSN이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재미있기에 굳이 이를 SMN, NMS 등으로 바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DESK도 영국 토트넘 홋스퍼의 주전 선수 4명 D(델레 알리), E(크리스티안 에릭센), S(손흥민), K(해리 케인)를 함께 부르는 단어였다. 이를 두고 선발 라인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활약했던 손흥민이 왜 세 번째밖에 안 되냐며 화를 낼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케인이 마지막인 걸 못마땅해할 잉글랜드 사람은 있었으려나?) 네 사람의 이름을 한번에 말하려고 알파벳을 조합하다가 DESK가 나온 것이지 그 순서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DESK라는 단어를 만들기 위해서 한 선수에게는 성(姓)이 아닌 이름(名)의 첫 글자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어에도 성과 이름의 글자 중에서 아무 거나 가져와서 만든 '허동택(허재-강동희-김유택), 임진록(임요환-홍진호), 최신맥주(최정-추신수-로맥-최주환)' 같은 신조어가 있다. 이런 식이라면 한국어에서는 허동택이 아닌 '허유희, 강유재, 김재희' 등등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DESK라는 단어가 만들어지는 조합이 있는데 굳이 EDSK, KSDE, DKSE 등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물론 한국어도 '최신맥주, 임진'같이 기존 단어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지만 그 외의 조합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영어는 문자 특성상 모음이 없으면 단어처럼 발음을 하지 못하고, 알파벳 이름으로 읽어야 한다. (DESK는 [데스크]로 읽을 수 있지만, MSN은 단어로 읽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내 생각에 영어는 두문자의 조합을 만들 때 글자의 순서보다는 '신조어가 원래 있는 단어처럼 보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높다. 그러니 글자의 순서에 따른 중요도는 비중이 약하고, 자연스레 첫 글자에 대한 집착도 굉장히 낮은 것 같다.


간단하게 하나만 더, 한국어와 영어를 비교해 보자. 앞서 부모(父母)를 '모부'로 바꾸자는 일부 페미니스트의 주장을 언급했는데 이는 한자어를 만드는 방식에 대등한 것을 나열하는 병렬(竝列), 대우(對偶)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각각 독립적으로 뜻을 가진 '부(父)'와 '모(母)'를 합쳐서 '부모'를 만들 수 있고, 부모는 다시 부와 모로 떼어내서 쓸 수 있다. 하지만 영어는 이렇게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father와 mother를 붙여서 fathermother나 famo로 만들지 않고 완전히 다른 단어인 parents를 사용한다. 아무리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parents에는 father나 mother의 손길은커녕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애초에 '부모', '모부' 같은 순서가 없으니, 당연히 첫 글자를 가지려는 마음도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 참고 **

동아일보. 韓 “한일중” 中 “중한일” 日 “일중한”…3국 정상회의 명칭 속 숨은 의미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191224/98945780/1

연합뉴스. [팩트체크] '한일중'·'한중일' 어떻게 부르는게 맞나?

https://www.yna.co.kr/view/AKR20191223122100502

아주경제.[월가 인싸 이야기] '월가의 미친소·FAANG 창시자' 짐 크레이머

https://www.ajunews.com/view/20210603124949768#P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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