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재 <생각 노크>
첫 번째 이야기로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 대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건 전혀, 네버,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어쨌든 올여름 무더위에 푹 쪄져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내 눈과 머리를 번뜩이게 한,
세계인을 충격과 공포로 놀라게 한 그 개막식 덕분에 또 때문에 <생각 노크>를 이렇게 일찍 시작하게 되었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몰라서 덕분과 때문을 다 썼다.)
각설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나는 이번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고 났다.
나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러하였으리라는 것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온갖 논란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개막식, 우선 그 탈에 대해 몇 가지 말해 보려 한다.
· 탈(脫) : ‘그것을 벗어남’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이번 개막식의 가장 큰 특징은 경기장을 벗어나 도시 곳곳에서 펼쳐졌다는 데 있다. 인간과 역사는 이미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 뒤에 '최초의 탈경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예상할 수 있는 당연한 혼란과 논란이 일어난 건, 시간의 흐름이 아닌 공간의 펼침에 중점을 둔 행사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왜 이렇게 하기로 했는지는 나야 모르지만, 어쨌든 이렇게 하기로 했을 때 조명 같은 기술 요인과 보안 같은 안전 요인 등을 두루 고려하면 낮에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탈(脫)의 파격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노래든 춤이든 연기든 마술이든 차력이든 그 무엇이든 그것에 몰입해서 보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는 그 무엇도 아닌 '가림'이다.
핀라이트가 무대 위를 비춰 하이라이트를 줄 때 그 주변은 깜깜한 어둠이어야 한다. 영웅이 하늘을 날 때는 매달려 있는 줄이 보이면 안 된다. 손등 뒤의 카드도, 미리 잘라놓은 각목도 티가 나선 안 된다.
쇼(show)는 우리에게 최고의 판타지를 선사하기 위해 현실의 요소들을 눈에서 보이지 않게 제거한다. 보여 주고 싶은 것을 멋지게, 예쁘게, 황홀하게 드러내며 사람들을 홀리려면, '잘 가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경기장을 탈(脫)하자, 도시 곳곳이 무대가 되고 골목골목이 배경이 됐다. 그리고 낮에 떠 있는 해는 구석구석을 환하게 드러냈다. 춤추고 노래하는 그 모든 곳에 늘 보던 쇼와 같은 무대를 만들고 장비를 설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만한 예산도 없었을 것이고, 있다한들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중계화면에는, 핑크와 골드와 흑과 백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가수와 댄서들 뒤로, 군데군데 빛이 바래고 겉이 벗겨진 담벼락과 철교 다리의 녹슨 부분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힌다. 이상(理想)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하는 도시의 배경, 칼라가 아닌 감추었어야 할 무채색인 회색이 드러나는 것이다.
왜? 프랑스는, 파리는, 한껏 화장한 화려한 사람들 뒤로 도시의 '쌩얼'을 그대로 내보인 걸까?
· 탈: 얼굴을 감추거나 달리 꾸미기 위하여 나무, 종이, 흙 따위로 만들어 얼굴에 쓰는 물건
이처럼 파리라는 도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개막식을 안내하는 사람은 탈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한다. 그 사람은 실시간의 현장과 촬영된 영상에 번갈아 나오며 성화를 옮기지만,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사람은 걷고 뛰고 날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파리 곳곳을 소개한다. 나도 그 사람을 따라 지하에서 옥상으로, 작업실에서 무대로, 바다와 우주, 영화와 미술과 만화와 현실을 넘나들었다. 이 모험에서 만난 여러 상징과 알레고리를 읽고 싶다면 전문가를 찾아가면 되고, 나는 그 사람이 쓴 탈에 대해서 말할 게 있다.
중계해설에서는 '복면을 쓴 사내', '복면남' 등으로 그를 불렀다. (탈과 복면은 재료의 차이로, 얼굴을 가린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으로 봐 주길 바란다. 마지막에는 분명히 탈을 쓰기도 했다.) 굳이 맞혀보라면 나도 남자에 걸었을 것인데, 나는 성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뛰는 폼이나 동작을 보면 높은 확률로 남자가 맞겠지만, 성평등 올림픽을 주창하는 만큼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어느 성별로도 느끼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본다. 개막식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고 여러 추측과 주장만 돌고 있을 뿐이다.
성별은커녕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 안내자였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누구인지, 왜 탈을 쓰고 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누구여도 상관 없었고, 심지어 탈을 벗었을 때,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고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은, 특정한 '누구'가 아닌지 오래되었다. 그 사람은 아이디나 프사로 알 수 없는 '누구인지 모르는 누구', '익명의 대중 중 한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아예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우리는 이미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세상을 알아가고 있지 않은가?
· 탈(頉): 뜻밖에 일어난 걱정할 만한 사고
탈이 났다. 사전적 정의처럼 뜻밖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고 본다.
개막식에 대해 사람들이 내어놓은 평가와 의견과 생각은 좋게 말해 아주 다양했지만, 그렇게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 많은 말과 글을 소화시키기는 버거웠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는 늘 그러기 마련이라며 위로해 보려 해도, 그 쓰디 쓴 욕과 비난을 왕창 먹었으니 한동안 속이 쓰릴 테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저래도 되나 싶었던 장면도 많았다.
파리의 쥐는 워낙 유명하다지만, 그래도 굳이 보여 줘야 했을까? 중계 아나운서도 이 부분을 짚던데, 전 세계인에게 자기 도시를 소개하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장면을 넣는 이유는 뭘까 궁금했다. 그 뒤로 악어와 해골도 나왔는데, 이런 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클로즈업에서 카메라가 뒤로 빠지며 자신의 잘린 목을 든 사람이 화면에 툭 튀어나온 순간, 나는 뜨악했다. 카메라는 한 번 더 줌을 크게 빼며 그런 사람이 여럿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장면에서는 "다 잘될 거야"라는 노랫말이 울려퍼졌고, 건물 위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뿌려지는 연출이 이어졌다. 아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이런 장면을 보다니(보게 되다니? 볼 수 있다니?),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문득, 이걸 우리나라 올림픽 개막식에서 볼 수 있을까, 상상조차 못하겠다. (아니, 다른 어느 나라에서는 볼 수 있을까?) 그래도 해 봤는데,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라 해도 내가 국가를 대표하는 모나리자급 보물을 강물에 빠뜨리고 띄워놓는 이 '정신나간 짓'들을 아이디어라고 내놓는 우리나라 연출자의 이야기를 들을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국가나 민족,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과 의아함을 심하게 느낀 건 한국인인 나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 결국, 무엇이 노출된 것처럼 보였다는 장면은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개막식 연출자와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특정 종교와 관련된 이슈에 대해서 불쾌감을 드린 점에 대해 사과했다.
* * *
어쨌든 개막식을 끝까지 본 내 소감은, 프랑스와 파리가
'우리의 모든 걸 보여주겠다'가 아닌 '우리는 모든 걸 보여줄 수 있다'고 전한 것이라 정리하겠다.
우리는 고급 브랜드의 가방을 보지만 그 가방을 만드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무대의 배우들을 보지만 뮤지컬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뒤의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우리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 에펠타워와 노트르담 성당을 보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우리는 히스토리라는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때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지 않기에 '본 적이 없다'.
개막식은 이렇게 우리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듯했다.
그래서 이에나 '다리'와 센 강 위에 떠 있는 '바지선' 두 곳에서 동시에 펼쳐진 유로댄스 타임은 개막식 연출이 가장 강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공연이다.
두 곳에 있는 댄서들을 비교해 보면, 바지선 쪽이 공공의 영역에서 허용될 법한 평범한 차림의 사람들이다.
다리 쪽은 상황이 심각하다. 우선 가장 뚱뚱한 사람을 가운데에 놓은 자리 배치부터 눈에 들어온다. 바지선에서 못 봤던 어린이, 장애인도 있다. 희한한 옷을 입거나 찢거나 벗어젖힌 건 말할 것도 없고, 드랙 킹/퀸의 차림은 할말이 없다. 그들은 이상야릇한 동작을 춤이라고 우기고 있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란 벌거숭이는 드러누워 노래를 불렀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점잖은 말로 하면 각양각색의 별의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찔한 옷 때문에 노출과 관련된 이슈도 다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공연이 중요한 건 그들이 있는 자리의 높이에 있다. 아래를 내려다 봐야 하는 바지선에는 주류인 대중이, 위를 올려다 봐야 하는 다리에는 비주류인 소수가 있다. 위아래가 뒤바뀐 듯한 상황에서, 사회적 지위와 계급의 전복을 읽은 것이 무리한 해석은 아닐 거다. (나아가 프랑스 혁명까지 읽힌다면 오바일까?)
더 중요한 것은, 이 어질어질한 광란의 춤판이 교차편집되는 장면을 보며, 날것 같이 펄떡이는 양쪽 사람들의 몸짓에서, 어떤 기준으로 구분된 두 그룹이 근본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방송을 볼 때는 불어로 블라블라해서 못 알아들었지만 나중에 온몸이 파란 사람이 부른 노랫말이 이런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가사를 보고 그 사람이 벌거벗고 나온 의도도 이해는 되었다. 다음 순서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어진 '이매진'과 '사랑의 찬가'도 이런 메시지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겠다.)
올림픽은 보통 전 세계인에게 '우리는 하나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하지만 프랑스와 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나 하나가 모여서 우리다'.
이는 성화 봉송이 주자들의 릴레이 형식으로 진행되지 않고 한 명, 두 명씩 늘어나며 같이 뛰어가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처음 성화를 전달한 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건네고 그 둘은 같이 뛴다. 그 다음 세 명이 더 늘어나고 그들도 같이 뛴다. 수가 더 늘어나 여러 명이 되었을 때 주자들은 속도를 줄이고 걷는다. 그렇게 몇 걸음마다 사람을 더해간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휠체어를 탄 100살의 노인과 함께할 때, 주자들은 멈춤으로서 '우리'를 만든다.
그렇게 개막식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앞선 질문과 의문이 풀렸다. 낡고 빛바랜 아스팔트, 도시를 돌아다니는 쥐, 비극과 슬픔과 악행의 역사, 정체를 가린 누구, 외면으로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 ... 그 모두가 모여 우리가 되는 것이라고, 그 모든 것들이 모인 곳이 여기 프랑스 파리라고 생각했기에, 개막식에서 '가리는 것'에 애를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인의 축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타국의 가수나 선수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긴 것도 이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라는 나라와 파리지앵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내가 해석한 것이 맞다면- 한국의 정서 안에서 살아온 정통 코리안인 나에게는 이런 태도가 좀 오만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각종 논란을 부르며 사과까지 했으니, 결과적으로 현재까지는 이번 개막식 연출에 그들의 오판이 많았다는 평가도 기꺼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오만함을 재수없다고 흘겨 버리고 말면 안 될 것 같다. 지금이야 놀란 마음에 뜨악했던 장면들을 씹어대고 있지만, 곱씹을수록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자꾸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