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5
언어교육 현장에서, 특히 외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로 단어카드가 있다. 선생이 단어의 기본형이 적혀 있는 카드를 보여 주면 학생이 그 단어를 활용해 여러 문장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영어로 예를 들면, 'go'라는 단어를 보고 "I go to school.", "We are going to school."처럼 새로 배운 문법을 적용해 말해 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주로 기초단어를 익혀야 하고 반복적인 문법 연습이 필요한 초급단계에서 사용된다. 학생들이 실제로 말해 볼 수 있게 하고, 다른 학생이 말하는 걸 들으면서 서로 문장의 오류도 점검할 수 있는 장점이 크기 때문이다.
나 또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 초급반에서 이 방법을 많이 썼다. 그러나 학생들이 아직 단어에 충분히 익숙하지 않다 보니, 이따금씩 사고(?)가 나곤 한다. 예를 들어, 글자가 비슷해 보이는 '가다'를 '자다'로 잘못 알고서 "학교에 자요."라는 식이다. 선생님이 뭔가 이상하다는 제스처만 보여 줘도 말한 당사자는 문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문장을 고쳐 다시 말한다. 배움의 현장에서 이런 귀여운 실수는 아주 흔하다.
반면, 아주 당황스러운 경우도 있다.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아래와 같이 형용사 어간을 만나 변화의 뜻을 나타내는 어미 '-아/어지다'를 배울 때 있었던 일이다.
* 많다 + 아지다 → 많아지다
* 적다 + 어지다 → 적어지다
그 날도 역시 나는 단어카드를 사용해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단어를 보고 문장으로 말하기 연습을 했다. 어느 여학생 A의 차례에서 '맛있다'는 단어가 나왔다. A는 단어를 보고 한동안 생각하더니 우선 "맛있어져요."라고만 말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주어가 없는 문장에 뭔가 더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곧, A는 퀴즈에서 정답을 확신한 사람처럼 자신 있게 말했다. "남자가 맛있어져요."
응?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마치 A가 "남자가 멋있어져요."라고 말했고 그렇게 들은 것처럼, "네, 남자가 멋있어져요."라고 다시 한 번 말해 주고 재빨리 다음 카드로 넘어갔다. 그 상황에서 괜히 오류를 짚었다가는 오히려 A에게 망신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그제서야 주위를 살피고 다른 학생들을 보게 되었다. 한 학생은 괜히 자기가 더 부끄럽다는 듯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또 다른 학생은 민망한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겠는지 그저 흐뭇하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우리의 귀는 분명히 들었고, 모두의 뺨은 분홍으로 물들었다. 배움에는 논리적인 이해가 아닌 감각으로 알게 되는 것들도 있다. 그들은 A의 대답에서 단어가 잘못 사용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문장이 틀리지도 않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A는 '맛있다'를 '멋있다'로 착각했을 것이다. 뜻을 헷갈렸을 수도 있고, 단순히 글자를 잘못 봤을 수도 있다. 이처럼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글자 모양이 비슷한 단어들은 분명히 골칫거리다. 특히 처음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 중에는 상하좌우로 방향만 다른 한국어 모음(母音)의 모양과 소리를 구별하는 것을 유독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하나둘 배우며 익숙해질수록, 자신을 헷갈리게 했던 모음 덕분에(?) 한국어가 더욱 재미있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맛은 감각적이요, 멋은 정서적이다.
맛은 적극적이요, 멋은 은근하다.
맛은 생리를 필요로 하고, 멋은 교양을 필요로 한다.
맛은 정확성에 있고, 멋은 파격에 있다.
맛은 그때뿐이요, 멋은 여운이 있다.
맛은 얕고, 멋은 깊다.
맛은 현실적이요, 멋은 이상적이다.
정욕 생활은 맛이요, 플라토닉 사랑은 멋이다.
그러나 맛과 멋은 반대어는 아니다. 사실 그 어원을 같을지도 모른다. 맛있는 것의 반대는 맛없는 것이고,
멋있는 것의 반대는 멋없는 것이지 멋과 맛이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맛과 멋》피천득
'맛'과 '멋'에 대해서 아주 잘 정리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피천득 선생의 생각처럼 맛과 멋의 뿌리는 같지 않을까? 또 어느 학자는 맛이라는 미각에서 모음을 슬쩍 비틀어 멋이라는 시각적인 표현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획 하나, 점 하나만 바꾸어서 새 단어를 만들고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 한글, 한국어가 재미있을 뿐이다. 남자가 멋있어질 수도, 맛있어질 수도 있듯이 말이다.
** 참고 **
중부매일 <‘멋’ 의 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