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르고 어 다르고 여 다르다 (2)

한국인의 국어생활 6

by 집우주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듣는 사람이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말을 할 때 단어 선택과 억양, 어감 등을 주의깊게 신경써야 한다는 뜻의 속담이다. 일상대화에서는 흔히 '해(하다)'가 생략되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로 쓰인다. 흔히 알고 있는 해석이 아닌 이 속담을 문자 그대로 따져 보려고 한다.


글자 '아'와 '어'는 각각 모음(母音) ㅏ와 ㅓ이다. 모음은 단독으로 발음은 가능하지만 자음(子音) 없이 글자를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자음으로 분류되지만 첫소리(초성)에 놓일 때 소리가 없는 ㅇ(이응)이 있을 뿐이니 나는 이 문장을 'ㅏ 다르고 ㅓ 다르다'로 바꿔 보겠다. 두 모음은 다르다. 모양은 같은데 방향만 다르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치 좌우로 대칭을 이루는 데칼코마니(décalcomanie)처럼 말이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ㅏ를 쓰고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펼쳐서 ㅓ를 만들면 된다. 수학이 편하다면 평면 위에서 ㅏ를 Y축이나 Z축으로 180도 돌리면 된다. '맛'에서 그 기원을 찾는 '멋'처럼, 복제·전환의 맛과 멋이 바로 'ㅏ 다르고 ㅓ 다르다'는 말에 들어 있다.


이렇게 ㅏ와 ㅓ를 바꿔 써서 기존 단어의 뜻에서 조금 다른 느낌을 주는 새 단어를 만들 수 있다. 주로 의성어나 의태어,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에서 이런 경향이 많이 보인다.


* 하하 - 허허

* 파랗다 - 퍼렇다

* 나풀나풀 - 너풀너풀


'하하'는 신나고, '허허'는 점잖다. '파랗다'는 쨍하고, '퍼렇다'는 탁하다. '나풀나풀'은 가볍고, '너풀너풀'은 무겁다. 한국인은 ㅏ에서 밝은 느낌을, ㅓ에서 어두운 느낌을 받는다. 어느 교수의 말처럼 심지어 '밝다'라는 단어에는 모음 ㅏ가 있고 '어둡다'라는 단어에는 모음 ㅓ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ㅏ와 ㅓ의 교체는 느낌이 달라질 뿐 아니라 아래와 같이 상반되는 의미나 상황에서 쓰이기도 한다.


* 자 - 저

* 아서 - 어서

* 나훈아 - 너훈아


감탄사로 쓰이는 '자'는 상대방에게 자신있게 말을 건네지만, '저'는 말을 꺼내는 게 어색하고 조심스럽다. '아서'는 안달복달하는 사람의 급한 마음을 멈추게 하지만, '어서'는 친절하게 행동을 재촉한다. '나훈아'는 진짜고, '너훈아'(故 김갑순)은 가짜다. 주용필, 설훈도, 태지나, 현칠, 송대광, 임희자, 방쉬리, 패튀김, 이소다 등등 많은 모창가수들이 있지만 '너훈아'만큼 한 방에 확 와닿는 이름은 없다. 나훈아의 또 다른 모창가수 '나운하'도 있는데 이름을 바꾸는 방식에 있어서 아쉬운 감이 크다.


ㅏ와 ㅓ가 바뀐 한국어 단어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외래어다. 특히 영어 표기법에서, 과거와 현재에 쓰이는 단어가 달라지는 것이 보인다. 아래에서, 영어 알파벳의 A, E, I, O, U 모음 다섯 개 모두 ㅏ-ㅓ(또는 ㅑ-ㅕ)로 표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빠다 > 버터 ; butter

* 칼라 > 컬러 ; color

* 파마 > 펌 ; perm (permanent wave)

* 샤쓰 > 셔츠 ; shirts

* 아메리카 > 어메리카 ; America


'빠다'는 코코낫과, '버터'는 코코넛과 만난다. 아날로그 시절에는 '칼라' TV를 봤고, 디지털 시대에는 '컬러' TV를 본다. '파마'는 하나밖에 없지만, '펌'은 종류가 다양하다. 이렇게 과거에 ㅏ로 쓰던 단어의 모음을 ㅓ로 바꾼 것은 예전에 일본식으로 받아들였던 영어 단어를 최대한 원어 발음을 살리는 쪽으로 외래어 표기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일본어 문자인 가나(がな)는 모음 소리가 [아, 이, 우, 에, 오] 다섯 가지밖에 없다. 그래서 일본어는 한국어로 [아]나 [어] 소리가 나는 영어 단어의 발음을 표기하는 데 모음 あ[아]단의 글자들을 사용했다. 마후라(マフラー)가 머플러(muffler)로, 에아콘(エアコン)이 에어컨(air conditioner)으로 바뀐 것도 같은 이유다. ㅏ와 ㅓ에 점을 하나 더한 ㅑ-ㅕ 짝도 만들 수 있다. shirts의 일본식 표기 シャツ[샤쯔]의 영향을 받아 쓰이던 '샤쓰'는 오늘날 '셔츠'로 바뀌었다. '셔츠'는 어느 색깔이든 좋지만 '샤쓰'는 역시 노란색이다.


이렇게 ㅏ에서 ㅓ로 단어를 바꾸는 것이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외래어를 원음대로 표기하려는 것은 관련 어휘와 문법 체계에 큰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 중 하나로, America를 '아메리카' 말고 '어메리카'로 쓰자는 주장이 있었다. 충분히 일리가 있고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당장 눈앞에 펼쳐질 현실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어느 카페 메뉴판에 '어메리카노'라고 써 있다면, 정말 개인적으로 나는 일단, 재수없을 것 같다. 거기에서 모음조화가 깨져버린 '아어(아이스 어메리카노)'를 주문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수 10CM(십센치)가 표기법이 바뀌었다며 "어메~ 어메~ 어메~ 어메~ 어메~"를 부르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캡틴 어메리카'도 별로 마음에 안 든다. England(잉글랜드), Scotland(스코틀랜드), Ireland(아일랜드)를 표기할 때, -land를 원어 발음에 가까운 '-런드'나 '-른드'로 쓰자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이렇다. 기본 단어인 land가 [랜드]로 발음되기 때문에, 관련 어휘를 '-랜드'로 표기하는 것이 외래어 사용에 있어서 그 단어를 더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북어메리카', '중앙어메리카', '라틴어메리카', ... 분명히 '아메리카' 하나만 바뀐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번에는 모음 ㅏ와 ㅓ에 선을 하나 더 그어서 ㅐ-ㅔ 짝을 만들어 보겠다. <메기의 추억>이라는 노래가 있다. 외국곡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를 번안한 곡으로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으로 첫소절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메기'는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 이름 '마기/매기'(Maggie)이다. 원어로는 [마기]나 [매기]에 가깝게 들리지만 쓸 때 '메기'로 쓴 것이다. 심지어 한국어 발음을 소리나는 대로 알파벳으로 표기해 주는 노래방 가사에는 '메기 me gi'로 써 있다. "마기/매기가 뭐야?" "응, 사람 이름이래." "별 희한한 이름도 다 있다."라고 넘어가고 말았을 것을 '메기'로 쓰는 바람에 어떻게 잔디밭에서 물고기랑 같이 놀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가수 크라잉넛(Crying Nut) 멤버들도 어릴 적에 그 노래를 듣고 혼돈에 빠진 적이 있었는지 그들의 노래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에서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가 한 마리 살았대 어떻게 풀밭에 메기가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라는 가사로 이를 풍자했다.


'ㅏ 다르고 ㅓ 다르다'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ㅑ-ㅕ로, 또 ㅐ-ㅔ까지 나아갔다. (물론 ㅒ-ㅖ도 가능하다.) 모음 ㅏ와 ㅓ만 바꿈으로써 단어의 느낌이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확인했고, 시대나 사용자의 언어 습관에 따라서 둘 중 어느 하나로 선택되어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ㅏ와 ㅓ를 바꿔 보는 것만으로 재미있고 위트있는 말을 얼마든지 만들어 볼 수 있다. '캄캄'한 것은 눈앞이고, '컴컴'한 것은 눈밑이다. '법' 없이는 살아도 '밥' 없이는 못 산다. '개'는 앞으로 가고 '게'는 옆으로 간다. 직장인이라면 '결재'와 '결제'를 헷갈려서는 안 된다. '얘'는 부르는 말이고, '예'는 대답하는 말이다. 정치에서는 현재 집권하는 당을 여(與)로, 그렇지 못하는 당을 야(野)로 부른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며 상대 당의 말에 꼬투리만 잡으려는 정치인들은 '야 다르고 여 다르다'는 걸 알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될 일이다.



** 참고 **

오마이뉴스 <'아메리카'와 '어메리카'가 다른 사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1476


재외동포신문 <'아'와 '어'의 표정>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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