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국어생활 1
외국어를 배울 때, 단어를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에 모두들 동의할 것이다. 분명히 단어는 많이 알수록 도움이 된다. 외국어 교재를 펴면 한 페이지 가득히 단어가 정리되어 있는 걸 쉽게 볼 수 있는데 한국인을 위한 영어 교재라면 보통 영어 단어가 나열되어 있고 그 옆에 한국어로 뜻이 적혀 있다.
이런 구성은 많은 단어를 짧은 기간에 공부해야 할 때 효율적이다. 나는 이렇게 외국어 단어를 공부하는 방법을 단어를 익히는 방식이 아니라 외우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외우는 방식은 특히 시험을 준비할 때 무척 유용하다. 하지만 이 방식은 설익은 열매를 따는 것과 같다. 충분히 익지 않은 열매는 먹지 못하니, 이렇게 해서는 단어라는 열매의 이름, 모양, 색깔 등 겉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열매를 제대로 알려면 결국 맛을 봐야 한다. 그러려면 열매의 속이 잘 익어야 하니, 우리는 그 단어를 잘 익혀야 한다. 외우는 방식의 치명적인 단점은 이렇듯 단어의 겉만 보고 그 맛은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외국어 시험에서는 나름 만족할 만한 점수를 받으면서도 그 외국어로 말하고 듣는 실력은 좋지 않은 경우를 흔히 봐 왔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외운 단어는 시험 문제나 퀴즈를 풀 때는 유리할지 몰라도 정작 그 외국어로 대화할 때는 잘 생각나지도 않고 입에 잘 붙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그 단어의 뜻만 알고 실제 언어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말을 하다가 부끄럽고 민망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교재에서는 외국어 단어의 뜻을 모국어 단어의 기본형으로 나열해 놓는데 그 뜻의 핵심조차 제공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어를 배우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칠 때 사용했던 초급 교재에는 ‘물고기’와 ‘생선’의 뜻이 이렇게 써 있었다.
* 물고기 : fish
* 생선 : fish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 봐, 두 단어는 같은 과에서 같이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 드린다. 교재를 순서대로 공부한다면, 외국인 학생은 먼저 '물고기 = fish'를 배우고 나중에 '생선 = fish'를 배우게 된다. 이때 학생은 왜 'fish'로 번역되는 단어가 한국어에는 두 개나 있는지 의문이 들어서 질문할 수 있다. 만약 학생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냐고 학생에게 되물어봐야 하는 게 선생이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누구에게 물어볼 수 있거나 검색이라도 해 본다면 다행이지만, 그러지 않고 "한국어에서는 둘 다 사용하나 보다"라고 넘어가게 되면 문제가 된다. 그 외국인은 한국 식당 메뉴판에 적혀 있는 '생선'을 읽고서 자신이 그 단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뿌듯해할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자주 이용하는 마트, 가게에서 많이 보이는 '생선'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서, 수족관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향해 자신 있게 '생선'이라고 말을 했다가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표준국어대사전>
* 물고기 : 어류의 척추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생선 : 먹기 위해 잡은 물고기.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에게 '물고기'와 '생선'을 'fish'로만 알려 주는 것은 책이라는 매체, 교재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아쉽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날 나도 그렇게 외국어를 배워 왔고, 단어를 외워 왔다. 내가 더듬어가며 겨우겨우 뱉어냈던 외국어 문장들, 덕지덕지 기워 붙인 단어들로 만들어낸 그 말에는 ‘물고기 = 생선 : fish’ 같은 오류가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니, 선생의 엉터리 외국어를 잘 참아주고, 때로는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었던 학생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