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되고 싶은 막내, 받침 (1)

한국인의 국어생활 9

by 집우주

"첫 번째 문제, 상! 식! 예 아~"

"1944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비행 도중에 행방 불명된 프랑스의 공군 장교로, 그 전해에 출간되어 현재까지도 전세계적으로 읽히고 있고, 한국에서도 100종 넘게 출판된 작품인 <어린 왕자(Le Petit Prince)>의 저자이기도 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생떽쥐뻬리 ② 쌩텍쥐페리 ③ 쌩떽쥐뻬리 ④ 생텍쥐베리

⑤ 생떽쥐베리 ⑥ 쌩텍쥐베리 ⑦ 쌩떽쥐베리 ⑧ 생텍쥐페리


2000년대 초반에 방영했던 TV프로그램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의 코너인 방석퀴즈에나 나올 법한 문제로 글을 열어 봤다. 보기를 읽어내는 호흡을 늘이고 줄여가며 출연자들을 쥐락펴락, 분위기를 들었다놨다했던 유재석의 진행을 떠올리며 퀴즈를 맞혀보기를 바란다. 정답으로 현재 외래어표기법에 따른 바른 표기를 고르면 된다. '생/쌩', '떽/텍', '베/뻬/페' 눈을 부릅뜨고 글자가 다른 부분을 잘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정답을 맞히기는 쉽지 않다. <어린 왕자>를 언제 읽었고, 어느 책을 읽었는지에 따라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저자의 이름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 생떽쥐뻬리 (세계문학전집, 1960)

* 쎙 떽쥐뻬리 (문예출판사, 1973)

* 생떽쥐베리 (을지출판사, 1986)

* 쌩 떽쥐뻬리 (소담출판사, 1990)

* 생 텍쥐페리 (육문사, 2001)

* 생텍쥐베리 (미래엔아이세움, 2008)

* 생텍쥐페리 (새움, 2017)


보기 중 오답 7개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잘못된 표기'로 제시된 예시들이다. 실제로 출판된 책의 저자 이름에서 띄어쓰기가 있는 것들까지 더하면 '<어린 왕자> 저자'의 한국어 이름 표기는 얼추 열 개가 넘는다. 정답은? '생텍쥐페리'다. (보기 번호 ⑧까지 정확히 말해야 정답이다.) 외래어 표기에서 특히 이름같은 고유명사는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며, 이때 원활한 언어 사용과 소통을 위해 예외를 최대한 허용하지 않고 하나만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생텍쥐페리'야 워낙 특이한 이름이라서 글자가 조금 달라도 눈치껏 알아볼 수 있겠지만, 축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호나우딩요'와 '호나우지뉴'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외계인인 것 같기는 하다.)


이처럼 외래어 표기에 대해서도 쓸 거리가 많으나 사실 이번 글에서 내가 다루려는 주제는 따로 있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다시 생텍쥐페리라는 이름을 잘 들여다 보자.


* Antoine de Saint-Exupéry ← 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 앙투안 마리 장바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


프랑스어가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에게도 생텍쥐페리라는 이름은 친숙하다. 한국어로 쓰면 본명이 엄청 길기 때문에 -프랑스어로도 만만치 않다- 보통 가운데 이름(middle-name)이 생략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로 쓴다. 한국인에게는 그냥 '생텍쥐페리(Saint-Exupéry)'가 더 편하다. de는 영어의 of에 해당하는 전치사로, 이름에 쓰이는 경우 가문(家門)이 뒤따른다. Saint는 철자가 같은 영어로 낯이 익다. 성인/성자(聖人/聖者)라는 뜻이니 아마 그는 가톨릭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룬 집안의 사람일 것이다. 영어에서는 [seint 세인트]로, 프랑스어에서는 [sɛ̃ 상/성]에 가까운 소리로 읽는데 ɛ̃ 소리가 한국어 발음에는 없는 비모음(鼻母音)으로 표기가 어렵다. 어쨌든 외래어표기법에서는 '생'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일단 그렇게 넘어가 보자. Exupéry는 이름이어서 국제음성기호 표기를 찾을 수 없었지만 들리는 대로 [에그쥐페리/이그쥐페리]로 받아적었다. 이것도 외래어표기법에 적당히 맞춰서 '엑쥐페리'로 바꿔 써 보겠다. 그럼 이제, Saint와 Exupéry를 연달아 읽어 보자.


* Saint + Exupéry : 생 + 엑쥐페리 → 생엑쥐페리


이상하다. 한국어로 분명히 '생텍쥐페리'로 쓰고 읽지 않는가? 애초에 '텍'이냐 '떽'이냐를 따질 문제도 아닌 것이, t 소리에 해당하는 글자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정리해 보면, Saint를 단독으로 읽을 때는 발음하지 않던 t 소리를 Exupéry가 이어질 때는 발음해야 하는 것이다. 언뜻 이해가 안 되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전에 프랑스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벌써 겪고 넘어갔을 일이다.


* les[레]

* les jours[레-쥬르]

* les alphabets[레-잘파베뜨]


프랑스어에는 단어를 단독으로 읽을 때, 마지막 글자가 자음인 경우 그 자음을 소리내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어 복수(複數) 정관사인 les를 단독으로 읽을 때 [le 레]로 발음한다. 마지막 자음 s는 소리를 내면 안 되는 것이다. les 다음에 jours처럼 자음(子音)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이어지는 경우에도 s를 읽지 않는다. 빵집 브랜드인 TOUS les JOURS의 s 세 개도 '뚜레주르'라는 한글 표기에서 해당하는 글자가 쓰이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자음은 바로 뒤에 모음(母音)이 연결될 때만 소리내어 읽어야 한다. les 다음에 a가 왔을 때 비로소 s가 [s/z ㅅ/ㅈ]로 자신의 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오래 전, 부푼 마음으로 프랑스어 책을 폈던 기억이 있다. 이리저리 혀를 꼬아 보고, 입과 코로 동시에 바람을 내 보기도 하면서 나름 열심히 따라했다. 그러다가, '글자를 써 놓고 이럴 때는 읽고 저럴 때는 읽지 않는다'는 발음 규칙을 보고서 "뭐 이런 그지같은 말이 다 있냐"며 그대로 책을 덮어버렸다. 사실 이미 발음이 안 되는 꼬부랑꼬불어(佛語)에 잔뜩 짜증이 나 있던 터였다. 그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 어쩌다 보니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학생이 수업에 들어온 날, 나는 느닷없이 깨달았다. 그때 나의 행동이 '누워서 침 뱉기'였다는 것을.



** 참고 **

블로그 <1960년에 나온 <어린 왕자>를 이렇게 다시 만났습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noevir007&logNo=220612138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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