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지긋지긋한 사춘기.
"나는 사춘기는 지나갔어, 엄마"
라고 말한 게 일 년도 안 된 것 같은데, 다시 사춘기의 한가운데에 놓인 큰 아들. 반항모드였다가 무기력모드였다가 우울모드였다가 진정모드였다가, 이 놈의 사춘기는 대체 언제 지나가는 걸까?
올해 초 둘째 아이는 질풍노도의 초입에 있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건 아는데 그게 잘 안 돼. 나는 왜 사는 걸까? 잘 살고 있는 걸까? 나는 존경하는 사람을 롤모델 삼아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데, 결국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누구를 존경하며 살아가야 해?"
철학자 같은 질문을 던지며 눈물까지 흘리던 둘째 아이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나보다도 생각이 깊은 아이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엄마가 마흔 넘어하는 고민을 너는 벌써 하니,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엄마가 책을 주문해 줄 테니 읽어보고 고민해 보며 스스로 네 가치관을 정립해 가면서 중심을 잡아 봐."
고민 끝에 고작 이 정도의 말을 했는데 아이는 그런 말은 필요 없다고, 그냥 들어달라고 했다. 엄마가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고. (F였던 나는 어느새 T 가 된 듯하다. 공감은 안 해주고 자꾸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다. "너 T야?")
고맙게도 아이는 나와 끝없는 대화와 일상을 벗어난 사소한 환기(학원을 빼고 영화 보러 가기, 집에 늘어져 있던 시간에 외출하기, 유튜브 보기 대신 책 읽기 등)를 통해 흔들리던 마음에 중심을 잡아가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마음속 이야기를 하지 못하던 둘째 아이는 마음에 고민이 쌓일 때마다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더니 엄마랑 이런 고민을 나누는 친구가 돼서 좋다고 했다.
"엄마도 너한테 고민을 이야기할 때가 제일 좋더라."
5월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큰 아이의 사춘기가 절정에 다다른 요즘이다. 잔소리했다가, 서로의 입장 차이를 설명하며 합의점을 찾았다가, 소리를 질렀다가 온갖 난리부르스를 떨며 지내온 지난 3개월.
나름 자기 속도대로 해 온 수학 학원 숙제가 조금씩 밀려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게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급기야 위경련까지 왔던 날, 그동안 대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걸까, 왜 이렇게 속을 썩일까. 나 힘든 것만 생각했는데 정작 제일 힘든 건 아이 본인이었겠다는 생각에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아이와 싸웠던 건 학업적인 부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급반성모드가 되어 큰 아이 옆에 딱 붙어 어깨를 주물렀다가, 등을 두드렸다가, 손목을 어루만졌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보니 하루가 다 지나갔던 지난 주말 밤, 열두 시가 다 되어 침대에서 만난, 아직 나와 같이 자 '주는' 둘째 아이에게
"동시에 하지는 마. 번갈아 해도 엄마한테는 365일, 매일이야."
라고 했더니 아이가 알겠다며 씩 웃어줬다. 두 아들만 번갈아 해도 매일인데, 나까지 질풍노도의 소용돌이 속에 있으니 정말 미치겠는 요즘이다.
너의 사춘기, 너희의 사춘기, 그리고 나의 사춘기. 지랄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의 지랄 총량은 언제쯤 채워지는 걸까?
남편과 사별 후 지난날 '나를 힘들게 했던' 욕심을 비워냈다던 나는,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아픔에 조금은 무뎌진 만큼, 그만큼 욕심이 다시금 차오른 모양이다. 아이의 마음이나 그에 따른 아이의 속도와는 별개로 나 혼자 아이에 대한 기대를 만들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는 걸 보니 말이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더불어 내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위로를 전하고 싶어 글을 쓴다던 나는, 지난 일 년 반 동안 소설가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스스로를 괴롭혀왔다. 나와 두 아이의 평안과 건강 그리고 행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은 어느새 욕심과 기대에 가려진 듯하다.
열심히 글을 쓰고, 걸어야겠다. 욕심과 불안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채울, 여전히 내 곁에 있는 행복을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