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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작가 Dec 18. 2021

눈  

내 마음에 슈가파우더

"엄마, 올 겨울에 눈은 언제나 온대?"

"글쎄."


날이 부쩍 추워지고, 겨울을 몸으로 실감하던 얼마 전부터 둘째 아이는 수시로 눈 소식을 물었다.  


"왜 그렇게 눈을 기다려?"

"그냥 기분이 좋잖아!"


둘째 아이가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눈이, 오늘 드디어 내렸다. 그것도 찔끔 내리다 만 것이 아니라, 몇 시간 동안 펑펑 내려 바닥에 소복이 쌓일 만큼이나!


"엄마! 밖에 좀 봐! 엄청 많이 내려. 온통 하얗게 쌓였어!"


별다른 감흥 없이 소파에 앉아있던 나를, 눈이 내린다며 흥분한 아이가 창가로 이끌었다.  




이십 대 후반에 결혼하고 서른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 후, 나의 삶은  내가 아닌 아이가 중심이 되었다.  한 살 한 살 나이 들어가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 채, 그렇게 나의 30대가 훌쩍 지나갔다. 눈을 감았다 떴는데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느낌이다.  타임슬립이라도 한 기분이랄까.


올해 마흔에 한 살을 더 먹은 나는, 그동안 나이 먹는 것에 대해 크게 실감을 못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연말에 가까워지고서 부쩍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실감하고 있었다. 30대는 앞서 말했듯, 아이에 집중하느라 실감하지 못했다.  마흔이 되고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건,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인지하지 못할 만큼 나의 인생이 커다란 폭풍 속에 휩쓸렸기 때문이 아닐까.


2년 전, 나의 인생은 갑작스러운 남편과의 사별이라는 폭풍 속에  놓였다. 그 폭풍에 휘둘리느라 그동안 다른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난 2년간 나는 아픔에 괴로워하면서도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하여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만큼 어둡고 혼란스럽기만 했던 폭풍 속에서 중심을 잡았다. 그렇게 아픔이 치유되기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얼핏 스쳤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친 겨울 어느 날, 어느새 중년이 되어버린 나 자신과 마주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젊음은 이제 서서히 나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던, 나보다 훨씬 어른이라고만 여겨졌던 중년이라는 시기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불혹을 넘긴 나이를 뒤늦게 실감하고서는, 인정하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연말을 향해 가고 있는 요즘, 내 마음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사소한 것에도 즐겁고 생기 넘치던 마음이 그저 졸리다고만 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아무런 의욕도 없이 자고 싶다고만 했다. 그렇게 나는 새삼스러운 마흔앓이 중이었다.




눈이 오기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눈 세상이 나를 밖으로 불렀다.


"엄마 잠깐 나갔다 올게!"


겨울이 왔을 때부터 눈을 기다린 아이를 뒤로한 채, 함께 나가겠냐고 묻지도 않고서, 혼자서 뛰쳐나와 눈 쌓인 거리를 걸었다. 길 위에 잔뜩 뿌려진 하얀 가루 위를 걸었다. 뽀득, 뽀드득.  

발로 한참을 밟은 하얀 가루는  떨어졌던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달콤한 슈가파우더였다. 아이가 기다렸던 눈은, 떠나가는 젊음에 의기소침해진  며칠 동안 겨울잠 자던  마음에 솔솔솔 뿌려진 슈가파우더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펭귄 모양의 스노볼 메이커를 샀다. 두 아이를 밖으로 불렀다.


"얘들아 우리 펭귄 만들자!"


며칠 동안 시달렸던 추위와 두통은 잊은 채 두 아이와 눈으로 펭귄을 만드는데 열중했다. 두 아이와 한 마음이었다. 아이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여전히 나는 두 아이 같은,  청춘이었다.






오늘 만든 펭귄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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