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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철 Nov 08. 2016

광화문에서 정동교회까지

<스토리펀딩>  4화


광화문 광장
서울의 중심거리인 세종로.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쪽으로 넓고 길게 뻗어 있는 이 대로는 이곳이 대한민국의 중심지임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는 곳이다. 과거 차량들만의 거리였던 이 대로가 지난 2009년 그 중앙에 너비 34m, 길이 550m의 보행 광장을 조성하여 다양한 정치 문화활동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북악산에서 시작하여 경복궁을 거쳐 광화문 및 세종로로 이어지는 큰 축선 상에서 느껴지는 강한 기운을 보행자들이 직접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이 광장이 지니는 큰 매력이다. 대한민국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대로 중앙에서 보행자들이 마음껏 여유를 부리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이 광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워낙 장소의 의미가 큰지라 갖가지 크고 작은 정치적 집회로 몸살을 앓고 있어 항시 도시민들의 휴식처로 다가오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장소이기도 하다. 아래의 그림은 이 광화문 광장을 흑백의 드로잉으로 표현한 것이다. 
 

광화문 광장 흑백 드로잉


이 흑백의 드로잉 위에 가을의 색을 입혀보았다.


가을을 입힌 광화문 광장


서울시청
광화문 광장을 거쳐 아래쪽으로 내려와 서울시청에 다다른다. 덕수궁 대한문 앞 건널목에서 바라본 서울 시청은 넓은 잔디마당을 앞에 두고 전면부에 일제 강점기 지어진 구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12년 개관한 유리로 마감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신청사가 그 뒤에 위치하고 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단아한 외관을 하고 있는 구관은 80년 넘게 서울시청으로 역할을 해 왔던 문화재라는 보존논리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하여 철거라는 고민속에 빠졌었다. 이 가운데서 택한 방법은 건물의 정면(파사드)와 중앙홀은 그대로 보전하고 나머지는 해체했다가 다시 원형으로 복원하는 방법이 택해졌다. 한옥의 곡선미를 형상화하였다고 하는 유리로 마감된 신관은 신관 위쪽이 앞으로 불룩하고 가운데가 쑥 들어갔다가 다시 아래로 흘러내리는 형상이다. 복잡하거나 다양한 재료로 수사적인 형태를 취했더라면 구관과의 조화가 쉽지 않았을 터이나 유리라는 재료로 통일시키고 건물도 큰 한 덩어리로 단순화하였다. 그 덕에 구관의 모습을 잘 투영하는 배경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형태적으로 한옥의 처마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보다는 구관은 물론 광장까지도 집어 삼킬 듯 한 쓰나미와 같은 커다란 파도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해석이야 다양하겠지만 나는 우리민족의 힘찬 에너지가 대한민국 심장부에서 솟구쳐 올라 앞을 향해 나가고자 하는 역동성으로 해석해 보고 싶다. 


서울시청



서울성공회 대성당
서울 시청 좌측 세종대로 건너편에는 덕수궁 뒷담에 면하여 고즈넉한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띈다. 서울성공회 대성당. 연속된 아치와 유럽풍의 오렌지색 기와로 지붕이 마감된 세월의 때가 켜켜이 묻은 건물이다. 유럽 중세의 고딕성당이 나타나기 전 로마인(Roman)들이 사용하던 기술(Esque)인 둥근 아치를 즐겨 사용하던 양식이라 하여 로마네스크(Romanesque)라 불리우는 건축양식이다. 


서울성공회 대성당


이 건물은 영국인 아더 딕슨의 설계로 1926년 1차 완공이 이루어지긴 하나 예산부족으로 의도했던 전체의 그림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1993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초기의 설계안대로 건물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앞서 서울시에서는 미완성의 형태인 기존의 건물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바 있어서 원래의 도면으로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 한 증축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난관에 빠져 있던 성공회측에서는 어느날 한 영국 관광객으로부터 런던 교외에 있는 한 도서관에 이 성당의 도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성당 대표들이 곧바로 영국으로 날아가 그 도면을 복사하여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하므로써 증축이 가능하게 된다. 증축을 시작한지 2년만인 1996년, 미완성이었던 건축물은 70년 후에야 원래의 설계안대로 완공을 보게 되었다. 요즘 그 건물을 가리고 있던 남대문 세무서 별관이 철거되면서 문화광장으로 조성되고 있단다. 조만간 완성된 광장을 통하여 시청앞 광장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멋진 서울성공회 대성당을 관조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덕수궁 
성공회 대성당을 뒤로하고 옆에 위치한 덕수궁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대한문을 지나 덕수궁 경내로 들어서면 고즈넉한 중화전을 지나 시원스레 물줄기를 뽑아 올리는 분수대에 도달하게 된다. 이 분수대에서는 서로 직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백색의 서양식 건물 두 채와 마주하게 된다. 남쪽을 바라보는 건물이 석조전, 동쪽을 바라보는 건물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다. 덕수궁은 원래 세조때 남편을 여읜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위해 마련한 건물이었다. 이후 한씨의 장남인 월산대군이 이 집을 물려받았다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임시로 왕의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승격되었다.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면서 이 궁의 명칭을 경운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순종 때에 그의 즉위와 함께 명칭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했던 고종이 이곳에서 황제로 즉위하자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국의 위상에 걸맞는 서양식 정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오니아 양식의 신고전주의 건축물인 석조전이 완성된다. 이 석조전은 일제 강점기인 1933년 이후로는 미술관, 국제회의장,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6·25전쟁 이후부터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지난 2014년 대한제국 당시의 가구들을 원래대로 배치하여 대한제국의 역사관으로 복원되었다. 아래의 그림은 석조전을 흑백으로 드로잉 한 것이다.


석조전 흑백 드로잉


그리고 아래의 그림은 흑백의 드로잉 위에 여름의 컬러를 입힌 석조전의 모습이다.


여름을 입힌 석조전


석조전 옆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올 해는 두 번을 가게 되었다. 한 번은 5월 고려인 2세로 소련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던 변월룡(1916~1990)전, 그리고 또 한 번은 이달 초에 전시가 끝난 이중섭 전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지난 5월 변월룡 전을 관람하고 나오면서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그린 것이다. 대한민국의 한 복판인 서울시청 옆으로 고궁의 열린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이다. 왼쪽에 자리한 서양의 신고전주의 양식인 석조전을 비롯하여 중앙에 전통양식의 중화전, 그 너머로 곡선미를 자랑하는 서울시청사, 그리고 양 옆으로 넓게 드리워진 모더니즘의 빌딩 숲. 덕수궁 현대미술관 앞에 펼쳐져 있는 풍광은 서울시내 한 복판에서 다양한 건축양식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건축전시장 그 자체이다. 넓은 영국식 정원 중앙에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고 있는 분수와 좌측으로 수양버들마냥 늘어진 벚나무 가지가 만들어 내는 자연스런 곡선은 주변의 건축물들과 한데 어울려 멋진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그냥 스쳐 지나기만 했었던 풍광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던 순간이었다.


덕수궁 현대미술관 앞에서 바라본 서울 정경



정동교회
덕수궁을 나와 뒤쪽 돌담길을 따라 정동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정동길과 덕수궁길, 서소문길이 만나는 로터리 귀퉁이에 세월의 때가 묻은 아담한 교회당이 눈에 들어온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가사 중 ‘언덕길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이라는 가사에서 나오는 그 조그만 교회당이 바로 이 교회다. 
그 이름 정동교회. 이 교회는 나에게는 깊은 추억이 있는 교회이다. 내가 그 옆에 있었던 배재학당을 다녔기 때문이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한 근대 사학이 배재학당이고 그가 설립한 교회가 바로 이 정동교회여서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지금은 명일동으로 캠퍼스를 옮겼지만 내가 재학시절에는 이곳 정동에 캠퍼스가 있어서 매주 한 번씩 이 교회에서 채플이 있었다. 노래를 좋아했던 나는 채플시간에 다른 친구들이 남성복사중창을 부르는 노래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를 계기로 합창반에 들어가 합창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가끔은 우리 반 채플시간에 내가 특송으로 솔로를 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듣거나 부를 때 그리고 이 근처를 지날 때면 늘 옛날 학창시절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배재학당이 설립된 1885년 그 해 10월에 아펜젤러에 의해 시작된 이 교회는 1897년 교회용으로 건물을 구입해 이를 수리해서 교회 이름을 벧엘 예배당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교인이 많이 늘어나자 1897년에 이 건물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역사가 깊은 교회당이다. 뒤쪽으로 1979년에 완공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교회의 규모는 크게 확장되었으나 정동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바로 이 벧엘 예배당이다. 벽돌조로 첨두아치가 특징인 고딕양식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앞쪽에 로터리가 만들어지고 차로를 줄여 보행로를 넓게 만들어 놓아 이곳은 보행자들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된 지 오래다. 요즘에는 수시로 교회당 안 뜰이나 덕수궁 돌담길에서 거리 음악회가 열려서 도심에서의 대표적인 문화의 거리로 자리매김 되었다. 함께 무대에 서곤 하는 지인이 며칠 전 이곳에서 연주를 하였단다. 언제 나도 한 번 정동교회 안마당에서 노래를 해 보고 싶다.


       

정동교회 벧엘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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