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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철 Jul 25. 2015

스페인 이슬람 건축의 백미 알함브라 궁전

'붉은 성'이란 뜻의 알함브라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 위치한 이슬람 건축의 백미로 손꼽힌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란 뜻인데 성곽의 벽에 붉은 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가 멸망한 뒤 이베리아 반도는 711년 아랍계 무어인들이 점령하면서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무어인의 우마야드 왕조는 모슬렘에게 점령당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자는 기독교세력의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으로 그들의 수도 코르도바를 버리고 이 곳 그라나다에 정착하여 그라나다 왕국(1238~1492)을 건설하게 된다. 


금세공을 하듯이 지은 궁궐

알함브라 궁전은 11세기에 그라나다의 왕이 성벽과 토대를 지었고, 1333년에 그라나다의 술탄 유세프 1세가 화려한 궁궐로 변모시켰다. 그런데 알함브라 궁전이 화려하게 장식된 시기는 그라나다를 비롯한 이슬람 왕국들이 쇠퇴하던 시기였다. 레콩키스타로 인해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고 상황에서 지어진 것이어서 그라나다 왕국의 황금기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세프 1세는 특히 건물의 내부에 온갖 정열을 쏟아 부었다. 외부는 붉은 색을 띠고 비교적 단순한 성채를 하고 있지만 그 내부는 인도의 건축처럼 모든 벽면과 천정이 마치 금세공을 해 놓은 듯 정교한 아라베스크(식물문양이나 기하학문양) 장식으로 이슬람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내부 장식을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식물문양의 정교함이 보는 이의 눈을 의심하게 한다. 

섬뜩한 사건의 현장 '아벤세라헤스 방'

왕궁의 내부에는 12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분수대가 있는 사자의 정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정원에 면한 아벤세라헤스 방(Sala de los Abencerrajes)의 천정은 모사라베라고 부르는 촘촘이 박혀 있는 작은 종유석 모양의 장식이 뒤덮고 있어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방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사건은 섬뜩하기만 하다. 그라나다의 귀족 가문이었던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한 장수가 왕이 총애하던 후궁과 사랑에 빠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파티를 가장해서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청년 36명을 이 방으로 초대하였다. 방에 모인 36명의 청년은 왕이 미리 매복해 놓은 병사들에 의해 모두 몰살시켜 버렸다. 이 때 흘러내린 피가 중정으로까지 넘쳐 흘러 중정 중앙에 있는 12마리의 사자상에서도 붉은 피가 흘러나왔을 정도였다 한다. 

통한의 눈물로 성을 돌아보는 그라나다의 왕

그러나 놀라우리 만치 정교한 건물의 내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궁궐도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던 해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의 카톨릭 부부왕에게 건네주고 아프리카로 쫒겨나게 된다. 이 아름다운 궁궐을 빼앗기고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 북아프리카로 쫓겨 가야했던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이 궁궐을 뒤돌아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보아브딜은 북아프리카에 알함브라보다는 못하지만 비슷하게 지은 궁궐을 만들어 살다가 죽었는데 남은 평생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을 그리다가 죽었다 한다.  이 궁궐을 차지한 스페인 국왕이나 왕족들은 이 궁궐이 악마같은 이교도 상징이라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워 아랍어라든지 이슬람 상징만 제거하고 대부분을 그냥 둔 채로 그대로 궁궐로 썼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이교도 상징이라고 미워하던 기독교 종교인들에 의해 궁궐 일부분이 새롭게 기독교식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카를로스 5세는 왕궁 중앙에 르네상스풍의 왕궁을 지어 무어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함께 있는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 와중에 이전에 있던 아름다운 여러 건물과 장식들이 훼손되었다. 당시 스페인 왕은 막상 그렇게 만들어진 걸 보고 이슬람 양식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성을 다 부술 수도 없고 매우 이질적이라 흉물이 되어버렸다고 탄식하기도 하였다. 



알함브라의 전설

이 알함브라 궁전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함락되자 도시에 살고 있던 이슬람 사람들이 급격히 감소하고 알함브라 궁전은 방치되었다. 지금도 알함브라 궁전 뒤쪽 산에는 동굴 주거에서 생활하는 집시들이 많이 있는데 당시에도 궁전 주변에는 집시들만 살고 있어서 화려했던 이슬람 시절의 이야기들은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워싱턴 어빙이란 미국인이 마드리드 미국 공사관에 임명되면서 1829년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라나다에 머물면서 무어인들의 신비한 전설을 ‘알함브라의 전설’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책에서 찬란했던 이슬람의 문화를 자세히 묘사하는 한편 그곳을 점령했던 기독교 세력에게 그곳을 내어주고 떠나야만 했던 무어인들의 비애를 소상하게 그려냈다. 그라나다를 떠나야만 하는 마지막 무어 왕 보아브딜의 피맺힌 애환을 비롯한 무어인들의 환상적인 전설과 민담들을 가득 담겨져 있는 그의 책을 읽고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그라나다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스페인 정부에서는 알함브라 궁전을 국가 기념물로 지정하고 복원하여 지금의 아름다운 궁전으로 되살려 놓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궁전 가장 안쪽의 방에는 이 궁전을 세상에 알렸던 워싱턴 어빙을 기념하는 방을 만들어 그를 기념하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

아마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페인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이라는 곡을 잘 알 것이다. 기타의 은구슬이 굴러가듯 같은 음을 연속적으로 빠르게 터치하는 트레몰로 주법으로 주선율이 감미롭게 진행되는 이 곡 때문에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호기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타레가는 자신의 제자인 콘차 부인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타레가의 구애를 거부하였다. 사랑에 실패해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스페인을 여행하는 도중 그라나다에 들러 이 알함브라 궁전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는 달빛이 드리워진 이 궁전의 아름다움에 반하기도 하고 그가 사랑했던 콘차 부인을 회상하며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이라는 곡을 작곡하였다. 이 곡의 연주법인 트레몰로의 기법은 알함브라 궁전의 헤네랄리페 정원의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타레가의 실연의 슬픔과 달빛에 비쳐져 영롱히 빛나는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 그리고 이 아름다운 궁전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던 무어 왕 보아브딜의 애환을 생각하며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을 다시 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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