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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대 May 18. 2019

[꿈의 성공 에세이] 손정의 _1

이 사업은 성공합니다!

[꿈의 성공 에세이] '손정의'편

20대 - 이름을 알린다 ... 회사를 세운다

30대 - 사업자금을 모은다 ... 최저 1000억 엔 규모의 사업자금을 모은다

40대 - 한판 승부를 건다 ... 1조 엔, 2조 엔 정도의 규모로 승부를 한다

50대 - 사업모델을 완성시킨다

60대 - 다음 세대에 사업을 계승한다


이 5가지 단계의 50년 계획을 19살 때 만들었다. 그리고 ...  50대까지 모두 이루고 있다.


"오르고 싶은 산을 정하는 것으로 인생의 반은 결정된다."


- 소프트뱅크 '손정의 LIVE 2011' 중에서 -


이 사업은 성공합니다!

도쿄에 위치한 일본 총무성 청사

라이터 좀 빌려주시오. 난 이 자리에서 석유를 끼얹고 죽겠소!


2001년 8월 여름의 어느 날, 작은 체격의 한 남자가 일본 총무성(総務省)의 정보통신 부처 앞에서 피를 토하듯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고, 담당 과장은 소스라치게 놀라 이내 그에게 “제발 여기서만은 그러지 말아 달라”라고 만류한다. 더 흥분한 이 사나이는 이어 외친다. “그럼, 여기서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 당신들이 이렇게 책상이나 차지하고 앉아 책임을 회피할 때 우리는 피가 마른단 말이요!” 결국 이 날 이 관료는 일본 정보통신 제1 기업인 NTT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나이가 요구한 내용을 전달하게 된다. 


극적으로 총무성의 협조를 이끌어낸 이날 분신 해프닝의 주인공. 그는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다.


일본에 아직 초고속 인터넷이 상용화되지 않았던 2000년대 초. 일본 최대 IT기업인 NTT조차 전화모뎀보다 일부 개선된 ISDN 서비스 정도를 유지하던 인터넷 회선 수준이었는데, 소프트뱅크는 전화모뎀보다 100배, NTT 보다 5배가 빠른 ADSL 서비스를 그것도 NTT 요금의 8분의 1에 제공하겠다고 천명한 터였다. 제1 사업자인 NTT가 규모의 경제로 네트워크 관련 분야 시장을 거의 독점적으로 지배하던 그 시기, 이제 막 성장한 신규 업체가 내놓은 서비스 목표치 고는 사실상 무모한 도전인 셈이었다. 


이 도전의 가장 큰 산은 바로 NTT였다. 법조문 그대로라면 신규 업체가 요청할 경우 이미 전국에 통신망이 설치된 NTT는 기지국을 임대해주고 네트워크 구축도 대행해 주도록 되어있었다. 쉽게 말해 당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는 NTT의 네트워크를 빌려서 시작해야 가능했던 것. 그러나 자기가 보유한 인프라를 빌려서 더 싼값에 더 좋은 서비스를 하겠다는 신생 업체에게 호락호락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전국 소지역 단위의 각 지국에 일일이 행정절차를 거친 후 협조를 얻어내는 과정은 물리적으로도 시간이 걸리고 여기에 독점 기업의 텃세가 더해진다면 서비스가 더뎌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이미 2001년 6월 주주들과 국민들 앞에서 당당히 이 서비스의 시작을 알렸고, 이를 믿고 100만 명이 선 가입한 상태였다. 이러는 사이 8월에 개시하겠다던 전국 서비스가 9월로 지연되자 가입자들의 항의 전화가 폭주했고 손정의는 관련 주무기관인 총무성을 찾아 담판을 지은 것이다. 


총무성 당신들이 NTT에 똑바로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독점적 네트워크를 무기로 이런 불법 행위를 일삼는 걸 묵인한다면 100만 고객을 볼 면목이 없는 나는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2001년 이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서비스를 개시해 2005년 말 가입자 500만 명을 넘어서며 이후 사업적 안정화를 이뤘고, 일본의 인터넷 산업 환경 발전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한편 독점 위주의 일본 IT 산업계에 경종을 울리며 경쟁시대를 이끈 소프트 뱅크의 초고속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 'Yahoo! BB'.  

2001년 6월 19일,  소프트뱅크의 ADSL 서비스 'Yahoo! BB'를 발표하는 손정의 회장 (도쿄 오쿠라 호텔 컨퍼런스홀)

현재의 이러한 평가와는 달리 손정의가 당시 이 사업 구상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내부와 외부의 예상은 혹독하리 만큼 냉정하고 부정적이었다. 네트워크 분야로는 경험도 없는 회사가 그것도 이미 동 분야에서 견고하게 자리한 제1 기업에 협조를 얻어야 하는 동시에 경쟁을 해야 하고 여기에 막대한 사업규모에 비해 단가는 파격적으로 낮추었으니 누구도 이 사업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더 큰 악재는 막 닷컴 버블이 붕괴되던 시기로 소프트뱅크의 주가도 폭락한 상태여서 투자 자금 문제도 녹록지 않은 환경이었던 것.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소프트뱅크는 곧 파산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 제 방식대로 세상을 봅니다. 이 사업은 성공합니다!” 


2001년 6월 이 서비스 출시 기념 기자 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주를 설득했고, 자산으로 보유 중이던 미국 야후(yahoo) 지분까지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른팔이었던 최고 재무책임자는 회사를 걱정하며 퇴사했고 여기에 NTT의 비협조로 더뎌진 초기 서비스의 질에 대한 사용자들의 평가도 불만 일색이었다. 


이 같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후 약 1년간 손정의는 사장실을 버리고 좁은 사업부 회의실로 집무실을 옮겨 하루 19시간의 집무를 시행한다. 밤 낮 없는 회의와 밤샘 작업에 회의실 안은 직원들과 그의 시큼한 땀 냄새가 항상 가득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무료로 기기를 나눠주는가 하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가입 후 10일 내 서비스 개통 등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소비자들의 시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Yahoo! BB'의 서비스 메인 카피였던 '광대역(Broadband)'은 2001년 일본 10대 유행어에도 등극되어 있다. 


2003년 인기 배우 히로스에 료코가 출연한 TV CF 'Big Bag'편, BB와 광대역의 의미를 잘 연계한 CF의 인기로 빨간 가방은 'Yahoo! BB'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게 4년, 소프트뱅크의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는 500만을 넘었고 대형 통신사인 일본텔레콤을 인수하며 자체 망도 확보하는 등 수익성과 함께 안정적 서비스를 이루어냈다. 그 사이 일본의 초고속 인터넷 요금은 소프트뱅크와 NTT와의 경쟁을 통해 한국보다도 싸졌다. 마침내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그만큼 경쟁자가 적다는 뜻입니다. 당장의 시장은 작지만 곧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터이니 압도적 공세로 시장을 선점해야 합니다. 나는 폭풍처럼 몰아쳐 해일처럼 집어삼키기로 했습니다. 손정의가 아니면, 소프트뱅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리라 마음먹은 것입니다.” 


2019년 2월 28일, 2001년 이래 일본의 광대역 인터넷 문화를 이끌어온 'Yahoo! BB'는 추가 신규 고객의 접수 종료를 (눈물 나게) 안내했다.  

현실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를 먼저 정해놓고 이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앞에 나서는 추진력과 진실성 있는 리더십, 그리고 치열한 아이디어로 계획을 현실로 만들어낸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성공의 신화. 그렇지만 이는 그가 그리는 인생의 원대한 계획 중 하나를 실현해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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