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그가 세운 인생계획이 큰 그림을 그려낼 캔버스를 정한 것이었다면 화폭에 그려 넣을 그림에 대한 영감은 그 시절 접하게 된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즉 컴퓨터에 대한 관심이었다. 우연히 보게 된 과학 잡지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진 한 장. 손정의는 이 작은 부품 하나가 인류의 삶을 바꾸고 있다는데 주목하고 그의 미래 청사진을 IT와 접목하기 시작한다.
1970~2018년 Intel 마이크로프로세서 광고 모음
걷고 밥을 먹을 때조차 책을 놓지 않으며 목숨 걸고 공부를 하면서도 IT에 눈을 뜬 이 청년은 하루 5분씩을 투자해 발명을 시도한다. 그의 발명 중에는 당시 지도교수를 설득해 시제품을 만들고 특허를 낸 후 자국의 유명 가전 회사에 판매해 거금의 수익을 얻은 것도 있는데 이게 바로 샤프의 일•영 번역기였다. 당시 특허 판매 금액은 현재로 치면 15억이라고 하니 그의 특별한 재능과 치열했던 노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SHARP의 일•영 전자 번역기 IQ3000 (출처 : Yahoo! JAPAN AUCTIONS)
이후 1980년 스물셋의 나이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손정의는 IT산업에 뜻을 품고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간을 행복하게’라는 모토로 인생을 건 사업가로서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물론 출발부터 멋지진 않았다. 81년 9월에 고향 근처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소프트뱅크를 창립하고 당시 고작 2명이던 직원들 앞에서 귤 상자 위에 올라가 인생 50년 계획에 대한 일장 연설 후 그나마 2명의 직원들도 그를 정신 나간 이상주의자로 여기며 2달도 안되어 관두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정보 혁명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소프트뱅크의 기업이념
그러나 PC 대중화 시대를 앞두고 소프트웨어의 유통에 주목한 그는 멘토들의 조언에 따라 도쿄로 사무실을 옮긴 후 특유의 승부수를 던지는 사업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창업자금을 거의 다 털어 대형 IT 전시회의 홍보비로 쏟아붓고는 파산지경에 있던 그에게 지난 전시회에서의 홍보를 통해 알게 되었다며 일본 최대 대형 컴퓨터 매장의 소프트웨어의 납품이 맡겨진 것이다. 무일푼의 상황에서도 배짱 좋게 납품 요청 회사에서 선수금을 받고 멘토들의 도움으로 은행 대출까지 얻어낸 후 사업을 시작한 그는 이후 대형 SW업체들의 유통을 도맡으며 첫 매출을 올린 지 1년 만에 소프트뱅크를 매출 35억 엔의 중견 기업으로 키운다. 유통업에 이어 PC잡지를 발간하는 출판사업까지 사업을 확장해 역시 성공 대열에 올리는 등 인생 50년 계획의 20대 목표는 이미 이룬 셈이 되었다.
1982년 창간한 소프트뱅크의 PC잡지 'Oh! MZ' (출처 : Yahoo! JAPAN AUCTIONS)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온다. 창업 1년 반 만인 83년 봄, 만성 간염 판정을 받은 것이다. 상태가 위중해 의사들은 채 5년을 못 살 것이라고까지 전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던 것이다.
시한부 5년을 선고받은 청년 사장 손정의. 입원 당일 병석에서 그는 울었다.
잠시간이 아깝도록 치열히도 공부했던 유학생활 후 모든 것을 걸고 열정으로 시작한 회사는 이제 막 1년 반, 딸아이는 아직 갓난쟁이였다. 인생 50년 계획이 아니라 당장 5년 후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의 상황.
그는 초심을 되새긴다. 왜 사업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
'The David Rubenstein Show'에 출연해 자신의 지난 사업 역경을 인터뷰하는 손정의 회장 (2017.10)
자신의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기를 바랐던 초심으로 그는 남은 삶의 기간이 비록 5년이라도 지금까지와 같은 마음으로 살 것을 다짐한다. 5년 동안 자신의 바람을 실현할 수 있다면 역시 목숨 바쳐 일신할 것을 새삼 확인한다.
절망의 순간에서 이러한 자기 의지는 그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병실에 PC와 팩스를 설치하고 원격 경영을 하면서 사업을 지키기로 한다. 또 병마와도 더 치열하게 싸웠다. 이후 3년간 입·퇴원을 반복하며 새로운 치료법에도 도전하는 등 적극적으로 병과 맞선다. 그러나 악재는 계속 겹쳤다. 그 사이 새로 시작했던 자회사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은행 빚으로 빚을 막아야 했고, 신뢰해 온 유능한 임직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내고 독립해 회사를 차려나가는 배신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갈 때마다 그는 책을 들었다. 그렇게 읽어나간 책이 4000여 권. 손정의는 당시의 독서가 이후 인생에서 소중한 나침반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소프트뱅크의 경영전략도 그때 완성된 것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극기의 세월 속에서 그는 새 치료법을 통해 극적으로 병을 이겨내고 86년 5월 다시 일선으로 복귀한다. 물론 상당량의 빚과 회사 쇄신의 부담을 떠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