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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대 Apr 19. 2019

[꿈의 성공 에세이] 마이클 잭슨 _2

앨범 스릴러(Thriller)

[꿈의 성공 에세이] '마이클 잭슨'편

faith [믿음]     


남들은 내가 생각하는 걸 믿지 않았다.

모두가 의심이 많았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의심하면

최선을 다 할 수가 없다.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나는 항상 자신을 가진다.     

계획을 착수할 때는

그것을 100% 믿는다.

나의 혼을 그 작업에 불어넣는다.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나 자신이다.          

     

- 마이클 잭슨 자서전 'Moon Walk'중에서 -      



앨범 스릴러(Thriller)

기네스북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고 이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또 깨지기 어렵다. 이 앨범은 지금도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1982년 12월 1일 발매한 그의 6번째 앨범 ‘스릴러’에 기네스북은 더 많은 기록들을 부여했다. ‘미국 밖에서 1억 장 이상 팔린 최초의 앨범’, ‘최장 기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37주, 사운드트랙 제외)’, ‘가장 성공한 뮤직비디오’(앨범 타이틀곡 ‘스릴러’).

 

앨범에 수록된 총 9곡 가운데 7곡이 빌보드 탑 100의 10위 안에 올랐고 댄스 차트에서는 9곡 모두가 1위를 차지했다. 1984년 26회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이 앨범으로 총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최종 8개 부문을 수상해 당시 그래미상 역대 한해 최다 수상이라는 타이틀을 남겼다. 이날 실황중계 또한 그래미상 방송 사상 최고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제26회 그래미상 시상식 실황 (1984)

팝(pop)이라는 말이 Popular(대중적)의 준말이라는 것을 새겨볼 때, 우리가 최고의 팝 음악(pop music) 즉 대중음악이라고 인정할 기준은 사실상 하나다. 음악성? 예술성? 그렇지만 대중이 함께하고 알아주지 않는다면 진정한 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듣고 사랑해주었는가? ‘인기’ 그 자체가 바로 그 척도다. 앨범 ‘스릴러’가 최고의 팝인 이유다.


최고의 팝을 만들어낸 대중의 인기와 사랑은 한편 이 최고의 팝을 통해 팝의 역사를 변주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앨범 ‘스릴러’에서 발표된 뮤직 비디오는 순서대로 '빌리진(Billie Jean)', '비트 잇(Beat It)', '스릴러(Thriller)'의 모두 3편. 여기에 ‘스릴러’의 뮤직비디오 제작과정을 담은 ‘메이킹 오브 스릴러(The Making Of The Thriller)’까지 더한 총 4편의 영상물은 이 앨범을 비로소 완성하는 중요 요소였다. 잭슨이 이 영상물들의 제작에 파격적으로 공을 들였다는 것은 유명하다.


나는 텔레비전에 사람들을 못 박아두는 것과 같은 것,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어 지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질이 높은 것을 제공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는 촬영 현장에 서서 제작진들에게 이를 ‘짧은 영화’라고 불렀고, 촬영장비도 비디오카메라가 아닌 극장 영화용 '35mm' 필름 카메라로 진행했다. 당시 이 ‘영화’들의 제작비는 '빌리진‘이 25만 달러, ‘비트 잇’ 15만 달러, ‘스릴러’가 50만 달러, 그리고 ‘메이킹 오브 스릴러’에 추가 약 50만 달러가 투여됐다. ‘스릴러’의 제작 프로젝트는 통합 100만 달러 이상이 투자된 셈이었다. 당시 아티스트 한 명이 뮤직비디오 한 편을 제작하는 데 투자했던 비용이 통상 2만 5천 달러 내외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 ‘영화’들의 제작비는 50여 편이 넘는 뮤직비디오를 만들 수 있는 예산이었다. 이런 연유로 소속 음반사인 ‘에픽(Epic)'도 첫 번째 작품인 ‘빌리진’ 이후 후속 뮤직비디오들의 제작 투자에서는 손을 들었고, ‘비트 잇’과 ‘스릴러’는 잭슨이 직접 자비를 투자해 완성했다. 덕분에 가능한 한 영상적인 음악을 구현하고자 했던 그의 아이디어와 의도가 충실히 반영되었다.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의 수순으로 가장 이상적인 것은 많은 이들이 이 환상적인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도록 최적의 매체를 확보하는 것. 지금 같으면 수많은 음악 전문채널들과 유튜브, 페이스북 등 인터넷의 다양한 홍보 방식들을 떠올리겠지만 당시는 소수 지상파 방송 그리고 개국한 지 얼마 안 된 신생의 뮤직비디오 전문채널 정도가 유일한 매체 창구였고 이 밖엔 비디오로 직접 상품화해 발매하는 것이 주요 방안이었다. 잭슨을 쉼 없이 따라다니던 신문들은 뮤직비디오를 보여줄 매체로선 역할을 못했다.


그런데, 이 몇 안 되는 창구들마저 삐걱거린다면 작품은 제대로 빛도 못 보는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지상파에서의 노출은 한계가 있었고, 신생 뮤직비디오 전문 채널마저 협조적이지 않다면 이 것은 문제다. 1981년 개국해 아직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던 초창기 MTV가 바로 그 문제의 채널이었다. 24시간 뮤직비디오만을 방영하겠다는 채널의 콘셉트는 개국 당시 이슈를 일으켰지만 1983년 당시까지 록 음악 중심의 편향된 구성으로 일관하면서 상대적으로 전형적인 흑인음악을 구사하는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는 거의 편성하지 않았다. 로큰롤과 백인 음악으로만 화면을 채우며 시청자 층이 한정된 채널로의 어두운 길을 들어설 참이었다. 그러나 잭슨과 ‘스릴러’의 인기는 이 빗장을 풀었다.


1983년 3월 초에 '빌리진'의 뮤직비디오가 MTV를 통해 처음 방송됐고, 이어 '비트 잇'이 방영되었다. 당시 연예지 오스틴 크로니클(The Austin Chronicle)에서는 “인종의 벽을 허문 비디오”라는 찬사를 “빌리진”에 붙여주었다. 후일 팝 음악 대중화의 주요 매체가 된 MTV가 록 음악 위주의 시각을 벗어나 팝과 알앤비에 관심을 돌리는 데 이 일은 큰 계기가 되었다. 잭슨 이후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 재닛 잭슨과 같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채널에 꾸준히 방송될 수 있었고, 이는 MTV가 대중의 관심을 끄는 음악 채널로 성장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MTV는 나아가서 ‘메이킹 오브 스릴러’의 제작비를 직접 투자하고 자체 채널 방영권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이미 지난 '비트 잇'에서 선보였던 집단 댄스 안무가 뮤직비디오 사상 최초로 시도된 후로 현재까지 뮤직 비디오 포맷의 기원이 된 것처럼 14분의 대작 '스릴러'와 잭슨의 인터뷰를 포함한 60분짜리 다큐 '메이킹 오브 스릴러'는 이른바 ‘스토리 뮤직비디오’와 ‘메이킹 필름’이라는 지금은 너무도 익숙한 뮤직비디오의 형식을 정의했다. MTV 방송 후 비디오로 발매된 ‘메이킹 오브 스릴러’는 100만 부가 넘게 팔리면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뮤직비디오로도 기록되고 있다. 물론, 이로 인해 MTV의 채널 인지도와 음악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 제작 경향이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긴 설명이 무의미하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변화에 처음 기치를 올렸던 것은 분명 MTV였지만, 보수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던 이 매체를 변화시키고, 또 진화된 영상 음악으로 신(新) 문화의 시대를 열게 한 것은 앨범 ‘스릴러’였고, 마이클 잭슨이었고, 이를 사랑한 대중이었다. 대중의 사랑이 위대한 팝을 만들고, 그 팝이 다시 대중을 위해 팝의 역사를 바꾸는 문화 혁명의 한 장면이었다.

https://youtu.be/rfsVWYzNE38

뮤직비디오 '메이킹 오브 스릴러' MTV 방영 영상

한편, 앨범 ‘스릴러’의 발매 일이었던 1982년 12월 1일은 원래의 발매 예정일보다 한 달 이상 늦춰진 일정이었고 이 전설의 앨범이 자칫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번한 고비를 겪기도 했다.


녹음 작업은 순조롭게 끝났지만, 에픽 레코드의 촉박한 마감 일정에 밀려 음반의 최종 후반 작업이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시간을 요하는 몇몇 작업들은 일정을 맞추기 위해 일종의 타협을 피할 수 없었다. 서둘러 제작 일정을 맞추고 레코드사에 음원을 넘기는 검수가 있던 날, 9곡의 최종 본을 들어보던 마이클은 갑자기 흐느끼며 스튜디오를 뛰쳐나갔다. 그리곤 이내 스태프들을 향해 거칠게 얘기했다.  


“이건 발표하지 않을 겁니다. CBS(에픽)에 연락해서 말하세요. 이번 앨범을 넘겨주지 않는다고, 우리는 레코드를 발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입니다!” 


만의 하나 이때 마이클과 레코드 사간의 분쟁이 보다 격화됐었다면 우리는 졸작 ‘스릴러’를 만났거나, 또는 이 전설의 앨범이 탄생조차 못하는 불행한 80년대를 지낼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CBS는 그의 설득에 응했고, 잭슨은 앨범의 모든 곡을 다시 하나부터 열까지 재 작업한다.


“마음에 꼭 들지 않으면, 그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마음에 꼭 들 때까지 그 일과 씨름을 해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완벽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다. 정말로 자기가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비결이고, 그것이 제30위까지의 레코드와 몇 주 동안 베스트 원에 있는 레코드의 차이다.” 


몇몇 곡은 아예 편곡을 다시 하기도 했고, 보컬을 비롯한 여러 요소들을 다듬었다. 일주일에 2곡 정도만 수정하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한 달 여가 지나고 마이클이 다시 음원 검수를 하던 날. 매 곡이 플레이될 때마다 그는 환한 웃음을 보였고 그제서 이 작업은 끝날 수 있었다. 완벽주의자 마이클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의 앨범은 결국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얼마 뒤 증명했다.


“‘스릴러’라는 앨범 작업은 엄청난 일이었고, 마치 수렁에서 도망쳐 나온 것만 같은 것이었다. 나는 완벽주의자다. 죽을 때까지 노력을 계속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이 앨범을 만들었다. 작업에 들어가면, 나는 그야말로 대단한 자신을 갖는다. 계획에 착수할 때는 그것을 100% 믿는다. 나는 글자 그대로 혼을 거기에 쏟아 넣는 것이다.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나 본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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