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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대 Apr 19. 2019

[꿈의 성공 에세이] 마이클 잭슨 _3

그곳으로 갈 거야 (Got to be there)

[꿈의 성공 에세이] '마이클 잭슨'편

faith [믿음]   


남들은 내가 생각하는 걸 믿지 않았다.

모두가 의심이 많았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의심하면

최선을 다 할 수가 없다.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나는 항상 자신을 가진다.     

계획을 착수할 때는

그것을 100% 믿는다.

나의 혼을 그 작업에 불어넣는다.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나 자신이다.     

          

- 마이클 잭슨 자서전 'Moon Walk'중에서 -    


그곳으로 갈 거야 (Got to be there)


“대단한 연예인이 되고 싶어요, 세계를 평화롭게 하고 싶고 또, 언젠가는 성처럼 큰 내 집을 가질 거예요”


1963년 미국 동부 인디애나 주 게리 시의 한 초등학교. 아이들이 미래의 소망을 발표하는 시간. 작고 수줍음 많던 잭슨 씨네 일곱째 마이클은 이날만큼은 담담히 앞으로의 꿈들을 말했다. 아직 5살배기 때였다. 그렇지만 이때 말한 자신과의 약속들은 그가 성장해가면서 대게 이루어졌고 그 때문에 무척이나 행복하기도, 또 힘겹기도 했다. 물론 세상에 오직 그만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만...


당시 자동차 등 철강 산업이 주력이었던 작은 도시 게리. 조지프 잭슨도 철강 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기술자 중 한 명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퇴근 후에 자신의 밴드 '팔콘'에서 활동하는 기타 리스트였다는 것과 그의 아내 캐서린도 클라리넷과 피아노 연주를 즐길 줄 아는 음악 애호가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무려 9남매의 자식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토 등 그의 자식들이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됐을 때 조지프는 흥분했다. 자신의 못다 이룬 음악의 꿈을 실현할 또 다른 희망이었고, 한편으로는 궁색한 노동자 가족의 삶을 벗어날 기회이기도 했다. 생각을 굳힌 후로 그의 강도 높은 스파르타식 음악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 가족 밴드는 처음에는 장남이었던 재키와 차남 티토, 그리고 저메인의 3명으로 시작해 이내 말론까지 합류하면서 4명이 각 파트를 나누며 그룹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그들의 좁은 침실은 연습 때면 언제든 연주실로 용도를 바꾸곤 했다. 이때까지 메인 보컬은 저메인이었다. 어머니 캐서린이 ‘소울(soul)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의 춤과 음악을 그대로 따라 하는 5살배기 동생 마이클의 놀라운 능력을 실감하기 전까지는.


남자 형제 중 다섯째였던 마이클이 메인 보컬로 합류한 뒤 잭슨 가(家)의 이 5형제 밴드는 각종 오디션에서 승승장구한다. 소도시 게리는 그들에게 좁았다. 시카고로 뉴욕으로 무대를 넓혀갔다. 그 사이 그들의 아버지 조지프는 철강 소일을 줄이고 이들의 매니저로 나선다. 중소 규모의 클럽들과 점차 공연계 약도 많아지면서 예전보다 수입이 좀 더 나아진 때문이기도 했다.


반면, 이 형제들의 유명세가 더해질수록 평범한 유년 생활을 기대하기는 계속 어려워졌다. 하루 7시간에 달하는 오디션 준비와 공연 연습. 또 잦은 공연 활동과 교실로 찾아오는 열성 팬들 때문에 사실상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기 어려워 가정교사로 이를 대신해야 했다. 공연을 다니면서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5살부터 거의 당연한 듯 강행군의 생활을 익히 겪어온 마이클은 한편으로 쇼 비즈니스 세계와 엔터테이너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며 이에 익숙해져 갔다. 단, 그가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한 가지는 아버지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이며 거친 훈육 방식이었다. 조지프는 분명 이들의 열정적인 매니저이자 아버지였지만 그가 택한 방법은 잭슨가의 형제들의 유년기를 혹독한 기억으로 남게 해 주었다. 특히 마이클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때의 트라우마로 성인이 되면서 자신이 점차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을 싫어하게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마이클이 11살이 되던 1968년, 이들은 스티비 원더와 다이애나 로스 등 당대의 유명가수들을 배출하며 흑인음악계의 성지로 불리던 레코드사 ‘모타운’ 오디션에 합격하고 정식 가수로 계약을 하기에 이른다. ‘잭슨 Five’로 공식 그룹명을 정하고 이듬해 1969년 발표한 첫 싱글 곡 ‘I Want You back’이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1970년의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까지 이들의 노래는 4곡이 연속으로 넘버원을 기록했다. 이어 1971년 마이클의 생애 첫 솔로 데뷔 앨범 ‘Got to Be There’와 이후 싱글 ‘Never Can Say Good Bye’도 메가 히트를 기록해 빌보드와 음반시장을 휩쓸면서 리드 보컬이었던 마이클은 13살인 1971년 ‘잭슨 Five’를 대표해 음악잡지 롤링 스톤(Rolling Stone)의 표지 모델이 되기도 한다.

1971년, 13세에 롤링스톤지의 표지 모델이 된 마이클 잭슨 


1972년 솔로로 부른 영화 《벤(BEN)》의 동명 OST인 "BEN"이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자 당시 14살이었던 마이클은 최연소 빌보드 1위 가수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1974년 댄싱 곡 앨범 'Dancing Machine'에 실린 'Dancing Machine'과 'I Am Love' 도 역시 빌보드 1위를 차지한다.

1973년 소울 트레인에서 Dancing Machin을 부르면서 지상파 최초로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인 마이클 잭슨

이 시기 ‘잭슨 Five’는 무려 7장의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1971년부터는 이들 5명을 주인공으로 한 TV 만화 영화 시리즈 ‘더 잭슨 Five’가 어린이들의 프라임타임이었던 토요일 아침마다 전국으로 방영되며 당시 이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대변했다. 여동생 자넷조차도 바쁜 오빠들의 근황을 이 만화를 통해서야 알게 되곤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5년 그들은 모타운 레코드를 떠나 CBS의 에픽 레코드로 새둥지를 튼다. 모타운은 물론 최상의 작곡가와 프로듀서진들을 계속 지원했지만 이들은 모타운의 곡이 아닌 자신들이 직접 곡을 쓰고, 제작하는 음악적인 독립을 원했고 결국 이 부분에서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해 준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모타운에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만약에 그렇게 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구닥다리 그룹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기존 멤버였던 저메인은 모타운에 남기로 하면서 6형제 중 막내인 랜디가 합류해 다시 5명을 이루었지만 ‘잭슨 Five’라는 그룹명은 계약상 모타운에 귀속된 상태였기에 그들은 ‘잭슨스’라는 새 이름으로 활동했다. '잭슨스'는 1976년 앨범 ‘The Jacksons’를 시작으로 1984년까지 6장의 앨범을 더 냈으며 북미 투어 등 많은 콘서트를 한다.


그러나 마이클에게 있어 음악적 독립의 대상은 지난 소속사인 모타운 이기도 했지만, 실상 근원적인 부분은 그의 가족 밴드의 음악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천부적 자질을 부여받은 자가 택할 수 있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지만, 반면 그의 가족들은 마이클이 빠진 ‘잭슨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둘 사이 이해관계의 상충은 필연적이었고 지속적이었다. 심지어 이들의 인생 전체에 걸쳐서.


마이클은 에픽으로 옮긴 후 잭슨스 활동과 별개로 완전한 솔로로서 데뷔 앨범을 기획한다. 그리고 그 작업을 함께 할 결정적 파트너를 만나게 된다. 바로 퀸시 존스다. 얼마 전 마이클이 출연했던 영화 '마법사(The WIZ)'에서 배우와 음악감독으로 만난 인연은 가수와 프로듀서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프랭크 시나트라, 레이 찰스 등 역대 유명 뮤지션들과 일해 왔던 풍부한 경력과 실력을 갖춘 퀸시와 순간순간 천재성을 발현하는 21살 잭슨과의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1978년, 이 둘의 손길을 거쳐 600여 개 후보 곡 중 최고의 10곡을 선정해 발매된 솔로 앨범 'Off the Wall'은 전 세계적으로 판매량 1780만 장을 넘긴다. 타이틀 곡 'Off the Wall'을 비롯해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Rock With You’, ‘She's Out Of My Life’까지 한 장의 앨범에서 4곡이나 동시에 빌보드 차트 TOP 10위에 오르면서 마이클은 솔로 아티스트로서 최초로 이 진기록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앨범의 성과는 재즈, 펑크, R&B, 댄스 등 화려한 흑인음악의 정수를 마음껏 보여주면서도 대중적 인기까지 얻게 되었다는 것. 앨범 제목처럼 당시 음악에 존재하던 흑과 백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기념비적 앨범이었다.


단, 이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해 최다 판매량 기록에다 수많은 비평가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은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R&B 보컬상’ 단 1개 부문에 후보 및 수상을 하게 되면서 그는 충격을 받았고, 한편으로 다음 앨범을 위해 절치부심하는 계기를 갖는다.


“이 경험으로 나의 영혼에 불이 당겨졌다. 나는 다음에 만들어야 하는 앨범에 관한 일, 이번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그야말로 굉장한 앨범을 탄생시키고 싶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82년 12월, 그의 영혼에 당겨진 불은 앨범 ‘스릴러’로 전 세계에 드러났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앨범, 현시대 음악의 문화적 패러다임을 바꾼 위대한 앨범, ‘스릴러’. ‘팝의 황제(King of pop)’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 뒤로도 황제의 군림은 멈추지 않았다. 1987년에는 발표된 앨범 ‘Bad’는 발매되자마자 전 세계 20여 개국이 넘는 나라들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3500만 장이 넘는 판매고와 한 앨범에서 빌보드 싱글 1위 다섯 곡이라는 대기록을 또 남긴다. 이는 ‘스릴러’ 앨범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팔린 기록으로, 당시 한 가수가 전 세계 앨범 판매량 1위와 2위를 석권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그해 진행된 'Bad Tour'공연은 총 1억 25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 당시 가장 많은 수익을 얻은 공연으로 기록됐다. 이어 1991년 ‘Dangerous’, 1995년 ‘HIStory’까지 발표되는 앨범 모두 2000만 장 이상 판매고를 올렸고 이후에도 Invincible(2001) 등을 발표하며 황제의 건재함을 알렸다.  


 총판매 음반 7억 5천만 장. 세계 인구 9명 중 한 명 이상은 그의 앨범을 구입했다. 넘버 1 싱글을 차지한 곡 13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번 이름을 올린 몇 안 되는 아티스트. 그래미는 35살의 젊은 그에게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여했고, 기네스북은 마이클 잭슨을 "음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엔터테이너"로 지목했으며,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는 그에게 "금세기의 아티스트"상을 선사했다.


한편, 그를 ‘팝의 황제’로 등극시킨 앨범 ‘스릴러’. 이 앨범을 진정한 전설로 만든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을 꼽아보자면 이날의 TV 방송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83년 5월 16일, 지상파 텔레비전 NBC가 모타운 설립 25주년을 기념해 전국으로 방영한 특집 프로그램 <모타운 25>. 공연은 모타운 출신의 과거와 현재 가수들이 참석해 특별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모타운을 떠나 소속은 달라졌지만 주요 게스트에 ‘잭슨스’도 섭외를 마친 상태였다. 당연히 출연자들은 모타운 시절의 히트곡 들을 부르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잭슨은 특별한 그만의 출연 조건을 걸었다. 당시 발매 초기였던 앨범 ‘스릴러’의 곡 ‘빌리진’ 단독 공연이 그의 순서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 모타운의 스페셜 쇼에서 모타운 곡이 아닌 다른 음반사의 최신 곡을 부른다는 것은 분명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마이클이었다. 그들은 성공적인 행사를 위해 그가 필요했고 이 별난 조건을 수용했다.


이런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음악의 역사, TV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순간이 재현된다. 일명 ‘백 슬라이드’로 불리던 길거리 댄서들의 춤 동작을 보고 창안해 완성한 그만의 독창적인 댄스 스텝, 그의 새 춤이 오늘 이 곳 패서디나 시빅센터에서 그 첫 막을 여는 것이다.

<모타운 25 : 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히> (MOTOWN 25 : Today, Yesterday, Forever)

저메인과 함께 부른 ‘I'll Be There’가 잭슨스의 마지막 순서였다. 이제 마이클의 단독 공연인 '빌리진'. 우아하게 모자를 벗어던지는 제스처와 함께 1절이 끝나고 곧 이어진 간주. 그 짧은 간주 사이. 뒤로 앞으로 동시에 걸어가는 듯 우아한 백 슬라이드와 이어지는 현란한 스핀 그리고 마지막 발끝으로 서는 착지까지.


문 워크! 이 팝 역사상 최고의 댄스 스텝은 단 몇 초 만에 모두를 사로잡았다. 누구도 그 춤을 그렇게 출 수는 없었다, 그가 아니라면. 관객은 일제히 열광한다. 현장에 있던 그의 가족과 가수들이 먼저 그 경이로움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이날 공연은 5000여 만 명이 함께 시청했고 실황 비디오는 방송 직후 전 세계로 퍼졌으며 ‘스릴러’ 앨범은 놀라운 속도로 판매량이 증가한다. 잭슨의 역사는 이날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된다.


그런데 정작 공연을 막 끝낸 마이클 잭슨 본인은 이날 자신의 춤 동작에 실망하고 있었다. 연속 스핀 후 마지막 발끝 착지자세를 좀 더 오래 정지한 채로 유지했어야 했는데 연습만큼 안 나온 것이다. 주변의 축복 속에서도 그가 우울했던 이유다. 이 스텝을 완벽히 익히기까지 3년을 준비했다. 완벽주의자에게 실수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공연을 끝내고 다시 홀 아래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턱시도 차림의 아이 한 명이 그를 따라와 질문을 던졌다.


“저기요, 누가 그렇게 춤추는 것을 가르쳐줬나요?”

아이는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연습이야, 연습 덕분이란다.” 그가 대답했다.

소년은 자못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가 돌아서서 걸어가자 잭슨은 그제서 엷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내일은 없다, 내일이면 늦는다는 각오로 일을 하는 것이다. 연습을 해야 한다.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될 수 있는데 까지 자신의 재능을 닦아 뻗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자기의 전문 분야에 정통해야만 한다. 어떤 것이든, 그건 자기 것이다. 나는 언제나 자신에게 그렇게 일러주며 살아왔다.”


최상의 퍼포먼스. 도전, 그리고 연습. 완벽주의.

그는 그곳으로 가기 위한(Got to be there) 여정을 계속했다.

Michael Jackson - Got To Be There Album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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