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디온, 나탈리 콜, 어셔, 레이디 가가, 제이슨 므라즈, 제이미 폭스, 핑크, 토니 베넷,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저스틴 비버, 카니예 웨스트, 제니퍼 허드슨, 토니 브랙스턴, 해리 코닉 주니어, 자넷 잭슨...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85명의 세계적 가수들이 이 곳에 모였다.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였다. 오늘 이들은 프로듀서로 나선 퀸시 존스와 라이오넬 리치의 지휘 아래 입을 맞추며 약 7분에 가까운 대 합창곡을 녹음한다. 84세의 노 가수 토니 베넷부터 10대 아이돌 저스틴 비버까지 함께 보기 어려운 이들 85명 모두가 한 목소리로 코러스와 합창을 하는 진귀한 광경이 연출된 후 이어 각 가수 별 솔로 파트 녹음이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세계적 뮤지션들인 그들이었지만 각자의 솔로 파트가 곡 중 어떤 배열과 순서로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온전히 제작자에게 권한을 맡겼다. 그러나 한 명 자넷 잭슨의 경우는 예외였다. 그녀와 그녀의 오빠가 함께하는 파트 순서 8번째는 녹음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바로 앞 순서인 7번째 파트도 그녀의 오빠에게 미리 정해져 있었다.
We Are The World 25 For Haiti - Official Video
“ We are the world. We are the children.
우리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자손들입니다. (마이클 잭슨)
We are the ones who make a brighter day. So let's Start giving
우리는 더 밝은 미래를 만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도움의 손길을 나누기 시작해요. (마이클 잭슨 + 자넷 잭슨)"
자넷, 그리고 그의 오빠 마이클 잭슨을 포함한 85명의 뮤지션들이 함께 녹음한 이 곡의 제목은 ‘We Are the World 25 for Haiti’. 2010년 1월 강진으로 20만 명 이상이 숨진 섬나라 아이티의 지진 복구 성금 모금을 위한 자선 곡이었다. 이날의 녹음 장면과 음원이 담긴 뮤직비디오 및 싱글의 판매 수익 전액은 아이티를 위해 쓰여졌다. 다만, 자넷의 오빠는 녹음 현장에 함께 하지는 못한 채 그의 목소리와 뮤직비디오 화면으로만 이들과 함께 작업에 참여했다. 이는 25년 전 바로 이 스튜디오, 이 자리에서 그가 7번째 파트, 8번째 파트를 포함해 전곡을 녹음했던 ‘We Are the World’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티를 위해 다시 이 곡을 리메이크한 노장의 프로듀서 퀸시 존스의 다소 들뜬 육성은 1985년 1월 28일, 25년 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4년과 85년 사이 에티오피아에서 발생한 심각한 가뭄, 이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수천 명의 목숨을 굶주림으로 앗아간 사건은 당시 ‘기근’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될 정도였다. 인구의 절반은 빈곤으로 죽어가는 나라,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질병이 만연한 이 나라의 이야기가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된 이유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당시 미국의 가수이자 인권 운동가인 해리 벨라폰테가 ‘에티오피아 빈민 구호 활동’이라는 취지 아래 무보수로 자선 앨범을 만드는 프로젝트 그룹 ‘USA 4 Africa’를 기획한다. 여기에 총 45명의 뮤지션이 뜻을 같이해 동참하게 된다.
프로젝트의 프로듀서이자 음악감독의 중책은 퀸시 존스가 맡게 되었고, 그는 자선의 본 의미를 살리면서도 대중성과 음악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 특별한 곡의 작사와 작곡을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에게 부탁한다. 두 가수는 이후 나흘 동안 서로의 집을 방문하며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곡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눈다. 라이오넬이 건네 온 초안 수준의 멜로디를 그날 당일 스튜디오로 가져가 외부와의 접촉 없이 2시간 반 만에 리듬, 솔로, 코러스까지 모든 것을 완성해낸 마이클 잭슨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7분여의 대 합창곡을 단 시간에 작곡, 편곡해내는 그의 놀라운 음악적 재능이 잘 드러난 사례기도 하다. 한편, 이 곡의 가사는 작곡의 일부를 들은 여동생 자넷이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떠오른다고 얘기한 것을 바탕으로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스티비 원더, 폴 사이먼, 케니 로져스, 제임스 잉그램, 티나 터너, 빌리 조엘, 다이애나 로스, 디온 워릭, 윌리 넬슨, 알 자로우, 브루스 스프링스틴, 케니 로긴스, 스티브 페리, 대릴 홀, 휴이 루이스, 신디 로퍼, 킴 칸스, 밥 딜런, 헤리 벨라폰트, 레이 찰스...
수식어가 필요 없는 당대의 탑 싱어 45명을 한 날 한 시 한 자리에 모으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1월 28일 열린 AMA(American Music Award)에 참석하는 이들을 행사 직후 이 곳 스튜디오로 오게 하는 것. 결국 이날 밤부터 녹음은 시작된다. 사실상 전무후무한 작업이었기에 막상 녹음 현장에서도 다양한 아이디어가 오가며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 프로들이었고 무엇보다 이 특별한 경험을 모두 즐기고 있었기에 녹음은 순조로웠다. 아이디어를 구현하다가 곡의 일부가 변경되어야 할 때는 작곡가인 마이클이 앞에 나와 바뀐 부분을 선창 하면 그의 가이드 보컬을 듣고 해당 파트의 싱어들이 다시 녹음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잭슨과 함께 솔로 파트를 녹음한 가수는 다이애나 로스였고 25년 뒤 이 8번째 파트에서 잭슨의 녹음된 목소리와 함께 노래한 것은 그의 누이동생 자넷이다. 이렇게 밤부터 시작된 코러스 파트의 녹음은 새벽까지 이어졌고, 이어 솔로 파트까지 종료된 것은 다음날 아침 8시였다. 이날 참여하지 못한 레이 찰스는 후시녹음을 통해 곡의 종반부 그 유명한 애드리브를 부분을 완성한다. 역사적 명곡 ‘We Are The World’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 해 3월 8일 첫 싱글 발매가 이루어졌고, 그리고 4월 5일 오전 10시 25분, 에티오피아 구호 활동에 지지를 표명한 전 세계 8000여 개의 라디오 방송사들은 일제히 ‘We Are The World’를 방송한다. 노랫말처럼 음악으로 ‘세계가 하나’된 순간이었다.
‘We Are the World’는 발매하자마자, 싱글 판매 역사상 최고의 속도로 판매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꾸준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USA for Africa는 7백만 장의 앨범, 싱글, 카세트 판매 및 2백만 장의 디지털 판매, 그리고 관련 상품들의 판매 등을 통해 630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기록했다. 수익의 반은 응급 구호 식료품, 의약품, 피난민 서비스에 사용되었고, 남은 금액은 아프리카의 다양한 국가들에서 수행된 500개 이상의 구호, 재건, 개발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곡은 1985년 9월 ‘MTV 비디오 대상’ 2개 부문, 이듬해인 1986년 1월 AMA에서 2개 부문, 2월 25일에 열린 그래미상에서는 올해의 4개 부문을 수상한다. 마이클은 이날 그래미의 ‘올해의 곡(Song of the Year)’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어린이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애정을 소감으로 전하기도 했다.
노래 외에는 항상 어린이, 그리고 평화를 최상의 가치로 여겼던 잭슨. 2000년도 발행 본 기네스북에는 그가 갖고 있는 또 다른 기록 하나가 등재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부 단체에 가입했고 가장 많은 자선단체를 후원한 인물이 그것이다. 그가 가입한 자선단체는 넬슨 만델라 어린이 재단, 어린이 교육기관, 어린이 스포츠 재단, AIDS 후원단체 등 40여 개 정도이며, 이외에도 33개 이상의 다른 자선 단체들을 후원했다.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자선활동은 솔로로 데뷔한 이후로도 수없이 이어졌다. 1984년 펩시콜라 광고 촬영 중 머리에 입었던 화상에 대한 보상으로 회사 측에서 받은 150만 달러는 화상환자들을 위한 ‘마이클 잭슨 화상 센터’의 설립과 기부에 전액 쓰인다. 같은 해 빅토리 투어(Victory Tour)에서 얻은 수익 5백만 달러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그해 백악관에 초대되어 당시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으로부터 자선활동의 공로로 미국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이어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모두 50만 달러를 미국 흑인 대학 자금(United Negro College Fund)에 기부했고, 싱글 ‘Man in the Mirror’ 수익금 모두도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1990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진행된 시상식에서 그의 음악적 업적 외에도 그의 자선 활동을 칭송했다.
1992년 마이클은 앨범 Dangerous에 수록된 히트 싱글과 동명인 ‘세계 치유 재단(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설립한다. 이 재단은 자선 기부, 전쟁으로 인한 피해 지역,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의 치료를 목적으로 했다. 재단을 통해 미국 내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을 마이클의 네버랜드로 데려와 놀이동산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수백만 달러를 세계 각지의 어린이 보호를 위해 기부했다. 1992년 6월부터 1993년 11월까지 진행된 ‘Dangerous Tour’ 순회공연의 수익금 3700만 달러 전액도 ‘세계 치유 재단’으로 송금되었고 이후 보스니아 등 격전 지역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이집트, 가봉을 방문해 기아의 걸린 아이들 찾아가기도 한다. 1999년 6월에는 이탈리아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자선 콘서트에 출연하여 코소보의 전쟁고아들과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돕는데 참여하고 독일과 우리나라에서도 자선 콘서트를 진행한다.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공연들에 함께했고 수익금은 유네스코(UNESCO)와 적십자(Red Cross) 등으로 전달되었다.
2001년 3월 6일 저녁, 마이클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강단에 선다. 그의 재단에서 새로 시작한 새 캠페인 “The Heal The Kids”를 소개하면서 갖게 된 자리였다.
그의 강연은 나지막하고 찬찬히 진행되었지만 강렬한 퍼포먼스의 다른 어떤 공연보다도 그의 삶과 인생관, 그리고 그간 자선활동을 펼쳐온 이유들을 객석과 공감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마흔셋, 당시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마이클은 그 이유를 ‘용서’와 ‘치유’라는 단어로 담담하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