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꿈이 뭐야?"
무지개 빛으로 마냥 빛나던 시절 친구들끼리 이 질문은 단골 소재였다.
누군가는 비밀인 마냥 귓속말로 속삭이기도 하고 초등학교 시절 학급문고 한 페이지에 자신의 장래희망과 미래의 모습을 크게 그려 넣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십 대 초반에 성적과 현실이 사회 또는 대학문 앞으로 혹은 집안에 우리를 세워 입을 다물게 하였다. 더 이상 남의 꿈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 시기가 내 경우는 대학을 들어가서 다니는 과가 제시해주는 편협한 길로 들어가 보기로 정했을 때부터였다.
졸업을 하고 어디에 가서 어떤 일을 할지 대략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고 오히려 꿈에 대해 묻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삼십 대가 되고 나서는 현실에 집중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묻는 게 얼마나 의 없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묻는다면 다소 언짢은 질문이 될 수도 있다.
면접을 보기 위해 원서를 쓰거나 직장에서 자기 계발계획을 묻는답시고 1년 뒤, 5년 뒤, 10년 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으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지금 삶이 이렇게 고단하고 피로한데 굳이 그런 것 까지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었다.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말하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과연 그때 내가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질문을 바꿔서 이렇게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현재의 자신과 이상적인 자신에 대해 비교하고 그 사이의 부족한 점을 그럴싸하게 말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는 좋은 대답이 아니다.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무엇보다 글을 쓰고 싶어요. 그것이 뭐라도, 지금 내가 가장 잘 아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대해서요."
꿈에 대한 이야기로 먼저 글을 시작했지만 사실 처음 떠오른 질문은 "나는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까?"였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지금은 구체적으로, 속된 말로 일도 모르겠는 상태이다. 내가 가장 오래 보아 온 엄마라는 존재는 나의 어머니, 우리 엄마지만 너무나 주관적이라 제외하기로 한다. 때로는 누군가를 보고 저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 번도 저런 엄마가 되어야겠다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엄마라는 존재는 그냥 엄마이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있지만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무겁다.
그래서 잠시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보류하고 "어떤 할머니가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기로 했다. 먼 미래는 붕 뜬 시간처럼 마음이 가벼워지고 약간 설레기까지 한다.
길이며 지하철에서 본 우악스러운 할머니들은 제쳐두고 귀여운 할머니들을 우연히 보았을 때를 떠올려본다. 속으로 참 귀여우시다 나도 저렇게 할머니가 됐을 즈음에는 지금 하는 고민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입가가 초승달을 그린다.
그 할머니들 속도 모르고 어설프고 근거 없는 확신으로 잠깐 달콤한 상상을 해본다. 누군가 오늘 나에게 뭐가 되고 싶냐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고 다시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귀여운 할머니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