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해질 시간이 필요해

임신 30주

by 한 작자

임신 초반 입덧 증상이 있을 때 먹고 싶은 음식도 별로 없고 음식 냄새 자체가 싫었다. 그런데 포도만큼은 입에 넣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출근하기 전 델라웨어 포도 작은 한 송이를 급하게 뜯어먹고 집을 나서곤 했다. 태명도 포도에서 따왔는데 평소 좋아하는 과일인 자몽과 포도를 결합시켜 '포몽이'로 지었다.


임신 21주부터 배에서 미약한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포몽이가 더 이상 불안함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 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병원에 가서 초음파로 아이의 모습을 확인할 때만 내 자궁 속에 누군가 있구나 인지 할 수 있었지만 태동을 느끼고부터 부쩍 자주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첫 태동은 배에 가스가 찼는데 그 가스가 장속에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태동인지 장에 가스가 찬 것인지 긴가민가 한 시기가 지나고 배에 찬 가스와는 다른, 더 힘차고 묵직한 감각이 선명해져 갔다.


그렇게 포몽이는 불안해하지 말라고 여기에 잘 있다며 자신의 존재를 내게 알려왔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태동은 자주 '출몰'했다. 길을 걸어가다가도 "아", 회사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하고 있다가도 "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도 "아", 특히 자려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아" 소리가 연속으로 나올 만큼 센 태동이 있기도 했다. 이런 순간들에 적응이 필요했다. 몇 개월 전의 나라면 느끼지 못했겠지만 난 이제 임신부니까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고 잘 움직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임신 30주에 접어들면 태동의 양상이 조금 새로워졌다. 발로 차이는 느낌 이외에도 갈비뼈나 배를 안에서 밖으로 밀어내는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컴퓨터 앞에 허리를 수그리고 앉아 있다가도 포몽이가 밀어내는 바람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되었다. 아주 조용한 상태에서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태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려고 기다리기도 한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중에도 배꼽 기준으로 오른쪽 아랫배 부위에서 그의 발길질이 느껴진다.


임신한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 중 가장 새롭고 신기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태동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갑작스러움과 강한 강도에 가끔은 움찔움찔하더라도 이 느낌이 점점 좋아진다.


연인이나 배우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스킨십을 자주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임신 초기에는 뱃속에 정말 생명체라는 게 있는지 어설프게 느꼈다면 지금은 아이가 꾸준히 내 배를 차준 덕분에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낯선 사람을 만나서 친해지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던가.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 우리는 조금 친해진 거 같다.


이제는 그가 보내는 신호를 기다리고 누구보다 그의 상태를 궁금해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부디 너도 그러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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