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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작자 Nov 30. 2021

퇴사예언

너는 o월 o일에 퇴사한다.

반사적으로 묻고 싶다. "왜요?"

미래를 안다는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현재 나는 새로운 회사에 갈 날짜를 받아놓았는데 그런 와중에 드라마 지옥을 보아서인가 자꾸만 내 상황을 이입하게 된다. 지옥=일터, 예언=출근 예정일, 시연= 첫 출근 날 정도가 되겠다.

드라마 지옥에서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며 산다. 하지만 예언을 받아 놓은 나는 요즘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못해 아까울 지경이다. 그동안 가져보지 못한 내 시간을 누리고 또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읽은 책 '돈의 심리학' 내용에 따르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사람과,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 나는 퇴사 후 유효기간이 있는 행복의 정의를 실천 중이다. 


일터를 지옥이라고 칭한 이유 역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일을 하는 동안 머리와 목 어깨가 뜨거워지면서 보이지 않는 불에 내 몸과 영혼이 타고 있음을 자주 느끼리라. 조금 극단적인 비유이긴 하나 내게는 아직 일터가 지옥에 가깝다. 물론 내가 지옥이라고 칭하는 그곳을 지금도 잘 다니고 있는 후배와 선배들이 있다. 

3년 이상 근무했던 병원과 회사 두 곳을 모두 퇴사한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입사 예정일이 아닌 몇 월 며칠에 퇴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혹은 그런 예언을 듣는다면 일을 하는 게 조금 더 수월 했을까 하고 말이다. 


급여를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기간 동안은 수렁에 빠진 것 마냥 그곳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 최근 회사를 다니면서 어느 시점부터 연장 근무와 주말 자진 출근으로도 일의 양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일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오히려 하고 있는 study(과제)에 급작스러운 문제가 발생하거나 매일 새롭게 해결해야 하는 건들을 마주하면서 이건 내가 일을 하는 방법의 문제도 있겠지만 회사가 혹은 병원 자체의 시스템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원이라는 위치에서 어느 것 하나 바꿀 힘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그 무력감은 근무하는 회사 또는 병원을 '지옥'으로 바꾼다. 결국 수렁을 빠져나오는 길은 퇴사뿐이라는 생각에 몰두하게 되고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곳을 나와 다른 회사(지옥)로 가거나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낸 후 퇴직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일 년 중 반은 다니던 병원이나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했고 퇴근하면서 늘 '탈출'한다며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내가 다니던 지옥이 진짜 지옥과 다른 점이 있다면 '탈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랄까. 물론 이번 연도에 회사에 재택근무가 활성화되어 탈출을 해도 노트북만 열면 쉽게 지옥문을 열 수 있었다. 

 

내가 병원에서 근무를 하게 된 2009년 7월 첫 출근날, 누군가가 "너는 2013년 6월 30일에 퇴사한다."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그 예언의 당위성을 거부하고 싶어서 더 오래 근무를 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통 회사에 입사하는 날은 알아도 퇴사하는 날은 가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스스로 그만둘 날을 정하고 그날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쳇바퀴 삶에서 적어도 작은 위안이 돼 줄 거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만둘 것이니까 지금 하는 일이 조금 어렵고 힘들더라도 참아보자 혹은 그만둘 것인데 적당히 하자 혹은 끝이 있다니 다행이다 등등 여러 가지 반응이 교차하겠지만 끝을 알고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행복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행복 <------------------------------------------------------------------------------------------------------------> 불행 


나는 대게 그래야만 한다는 말을 들으면 "왜요?"라고 말하는 청개구리 같은 사람이다. 회사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도 나는 반사적으로 묻고 싶다. "왜요?"

- 회사는 오래 다녀야 해.

- 회사를 자주 옮기는 건 좋지 않아.

- 다른 곳 가면 더 좋을 것 같아? 거기서 거기야

- 조금 더 참고 다니지 그래.


우리는 적어도 스스로 예언자가 될 수 있다. 항상 예언만 받다가 예언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가슴이 뛴다. 드라마 지옥에서는 천국에 가게 된다는 예언을 들은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 적어도 스스로에게 지옥을 나올 수 있다고 예언을 할 수 있다. 

 

"나는 202x 년 4월 30일에 퇴사한다." 

현재 어떤 뚜렷한 계획이 있어야만 퇴사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슴에 얹힌 답답함이라는 돌덩이를 안고 매일 출근하고 언제까지 이 일에 시달려야 하는 걸까 고민하면서 잠에 들지 못하고 꿈에서도 일을 하는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친절함이다. 


나도 아직 다음 퇴사 연도를 정하지는 못했다. 일단 놀러 다니기에 아주 좋을 것 같은 계절인 봄으로 정했다. 위의 예언을 읽고 상상만으로도 엷게 미소가 올라온다면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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