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를 고르다가
토요일 저녁 늦게 대형마트를 갔다가 딸기가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 딸기 매대로 갔다.
늦은 탓인지 딸기 한팩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사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아서 딸기가 정말 먹고 싶었지만 사지 않고 돌아왔다.
일요일 오후, 어제 갔던 마트에 있는 미용실에 커트를 하러 간 김에 다시 딸기를 사러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보다 훨씬 많은 딸기 팩이 진열되어 있었고 상태도 꽤 좋아 보였다.
일단 눈으로 맛있게 익은 딸기를 골라보고 딸기 색깔을 살폈다. 무른 곳이 없는지 다시 스캔하며 확인했다. 얼추 비슷한 몇 개 팩이 눈에 들어왔고 한 줄에 세 개씩 큼지막한 딸기가 들어 있는 팩을 하나 골라 마트 바구니에 넣었다. 조금 무른 딸기가 있었지만 대부분 두세 개쯤 그런 딸기가 포함되어 있어서 고민 없이 골라 넣었다.
올해 첫 햇딸기에 대한 반가움일까, 한팩만 사긴 뭔가 아쉬워서 이번엔 조금 작은 사이즈이지만 개수가 많이 들은 한 줄에 네 개짜리 딸기 팩을 고르기 시작했다. 냄새도 맡아보았는데 마스크 너머로 단내가 났다. 역시 몇 개씩은 무른 딸기를 포함하고 있었고 고르면 고를수록 비슷해 보이고 감을 잃는 느낌이었다. 딸기 고르기는 참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회사는....
정확히 이틀 전 마지막 출근을 했고 퇴근을 했다. 육아휴직을 제외하고도 자그마치 4년이 넘게 다닌 회사였다. 마지막 날 누군가 내게 물었다. 진짜 퇴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퇴사하겠다고 이야기한 후 8주 동안 시달린 탓인지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 마트를 걸어가는 길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떠올랐다.
올해 6월, 회사에서는 모자란 팀장 인원을 외부에서 충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부 promotion이 있으니 참여 의사를 밝혀달라고 했다. 참여하지 않기도 무엇하여 promotion에 참여하여 프레젠테이션과 면담을 하였지만 팀장이 아닌 사원의 상위 직급을 주고 급여를 조금 인상해 주었다. 아직 팀장을 시키기엔 연차도 경험 도이르다는 임원의 판단이었다. 나도 일정 부분 동의하였는데 문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팀장들과 앞으로의 나의 대치 자체가 안될 거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임원들이 원하는 팀장의 조건은 global연구를 많이 접해본 경력이 최소 5년 차 이상인 CRA 혹은 Manager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내가 맡은 과제는 대부분 Local(국내) 과제였고 앞으로도 global과제를 많이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하나의 계기로 무너지는 중이었다. Promotion에 참여한 CRA는 나와 후배 2명이었다. Promotion 이 끝나고 모두 CRA 앞에 Lead를 붙인 채 없던 일처럼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후배와 점심을 먹게 되었다. 최근에 내가 새로 받은 과제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큰 질투 감을 느꼈다. 후배는 global과제를 인계받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하고 싶던 연구였는데 내게는 물어보지도 않았던 그 과제를 하게 되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속으로는 엄청나게 부럽고 머리를 한방 맞은 기분이었지만 나도 새로 받은 local과제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고비를 넘겼다. 국내 회사는 아니었지만 global CRO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운 회사의 입지로 대부분의 연구는 국내 제약회사에서 들어오는 연구였고 일부 해외 제약회사에서 들어온 연구는 소수의 CRA가 참여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국내 제약회사는 경력이 많은 CRA들을 선호했고 애매한 나의 경력은 국내 연구에 적합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회사의 방향과 내가 원하는 방향이 맞지 않으며 회사에서 내가 원하는 경력을 채워나가기가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든 그날 결심했다. 회사를 나가기로.
한 달 동안 global회사 4군데에 지원하고 면접을 보았다. 목표는 단 하나였다. 지금 다니는 회사를 나오기 위한 방법은 이직뿐이었기 때문이다. 구직 활동을 한지 한 달 만에 한 군데에서 나를 쓰겠다고 했다. 연락이 온날 점심시간에 너무 기뻐서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일주일 중 일정 요일을 정해 놓고 재택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line manager가 회사에 나와 있어 면담을 바로 신청했고 퇴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한 후 8주 동안 회사에서는 쥐어짜 내며 일을 시켰고 마지막 주에 간신히 인계를 다 마치고 회사를 나올 수 있었다. 너무 시달린 탓인지 새로운 회사에 입사일이 다가올수록 강하게 쉬고만 싶었다.
"쉬고 싶다. 그냥 쉬고 싶다." 내가 정말 이직을 원했던 사람인지도 모를 만큼 쉬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그만 두기 3주 전 채용공고를 보다가 global 제약회사 1곳과 global CRO 1군데에 CV를 추가로 제출해 CRO와 면접을 보았다.
회사를 그만 두기 1주 전이면서 새로운 곳에 입사 예정 1주 전 시점까지 메일을 주기로 했는데 마지막 근무일인 금요일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면접 시에는 거의 합격일 거 같은 좋은 기운이 있었는데 연봉을 너무 많이 불렀던 내 욕심 때문이었을까, 만을 새로운 회사에 가기 전에 붙었다고 연락이 온다면 나는 7주를 쉬고 입사를 할 생각이었고 간절하게 원하던 휴식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씁쓸한 마음으로 퇴사 후 주말을 보내고 바로 내일, 새로운 곳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새로 가게 될 HR 담당자가 면접 후 본인 회사에 대한 정보를 전화상으로 자세히 설명해주었지만 미지에 세계에 대한 두려움인지 예전보다 쓸데없이 아는 정보만 많아져서인지 출근이 망설여 지기만 하였다. 회사 지인 중에는 새로운 회사에 가서 이상하면 바로 나오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그 또한 얼마나 에너지 소비가 되는 일인지 알기에 어쨌든 내일 2번째 회사로 출근을 받아 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회사란 곳은 한번 가면 1년 이상은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란 곳은 나의 행복지수에 큰 관여를 하기 때문에 중요한 곳이다. 그런데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것 같기도 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회사이다 보니 두렵기만 하다. 또 급여도 많이 올리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다시 딸기 고르기로 돌아가 보자. 아니, 그래서 골라온 딸기가 맛있었을까부터 이야기해보자.
집에 오자마자 손을 씻고 알이 큰 딸기 팩에서 반, 알이 작은 딸기 팩에서 반을 꺼내 물이 든 바가지에 담갔다. 물로 헹군 뒤에 칼로 꼭지를 잘라냈다. 집에 있던 과일 전용 세척 가루를 물에 소량 풀고 딸기를 씻겨주었다. 물기를 털어낸 딸기들을 갖고 노트북이 있는 방으로 갔다. 포크로 찍어 딸기 한 개를 입에 넣고 맛을 보았다. 음,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먹었던 딸기 맛이다. 내가 고르고 고른 딸기의 맛이란 그런 것이었다.
딸기를 고르다가 회사 고르기를 멈추어야 할 때인가 다시금 생각해 본다. 더 큰 회사 더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가지 못한 우리들은 모두 패배자일까, 이전에 간호사로 일할 때 Big3, Big 5라는 타이틀을 가진 병원들이 있었고 그곳에 입사하는 간호과 학생들이 부러웠다. 나도 대학병원이라는 곳에 입사를 했지만 그들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크지도 그렇게 급여가 많지도 않았다. 그 기준으로 간호과 학생들을 나열한다면 나는 아마 중간 언저리에 서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겉보기에 예쁘고 잘 익은 것 같아 보여도 실제로 맛을 보면 별로인 딸기도 있다. 또 내가 본 딸기의 측면 반대쪽은 상해 있는 경우도 있다. 가끔은 상한 부분만 제하면 맛있는 딸기도 있지만 말이다. 또 큰 딸기가 맛이 있을 때도 있지만 더러는 작은 딸기가 더 달콤할 때도 있다. 맛있는 딸기를 고르기란 어려운데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회사를 고르는 게 아닐까 싶다. 고르면 고를수록 점점 비슷해 보이는 딸기들 중 결국 적당한 딸기를 골라서 맛있길 바라며 집으로 돌아가듯이 적당히 골라진 회사가 제발 나와 잘 맞기를 바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오늘은 퇴사한 지 이틀째 입사하기 하루 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