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찾는 중입니다만
23살부터 일을 시작했고 그동안 몇 번의 퇴사(병원 또는 회사)를 했다. 퇴사를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나를 그만두게 만들었던 걸까
1.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3년제 간호과를 졸업하기도 전에 나는 취업이 결정되었다. 간호과의 교수님들은 각자 긴밀하게 연결된 병원들이 있었고 그중 하나의 대학병원이었다. 내가 다닌 대학에서 일정 수준의 성적을 넘는 간호과 학생들에게 3학년 1학기쯤 면접을 볼 기회를 주고 간호사 면허증을 발급받기도 전에 취업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물론 간호사 국가고사에서 떨어지면 없던 일이 된다. 이때 한 곳을 가기로 정하면 다른 병원을 추가로 지원해서는 안 되는 것이 과의 룰이었다.
나는 2개의 병원을 두고 고민했다. 한 곳은 집에서는 가깝지만 실습을 나갔을 때 적응하기 힘들었던 분위기의 대학병원 A와 약간의 종교적인 색채로 인해 분위기가 좋다고 들려오는 집에서 1시간 넘는 거리의 대학병원 B였다. 나는 B에서 면접을 보고 합격하여 3학년 여름방학 때 OT를 SICU(외과계 중환자실)에서 2주 정도 받았다.
그리고 2009년 7월 19일 첫 출근을 했다. 그날은 나의 양력 생일이었다.
9월이 되어서 수습 기간을 마치고 진짜 한 병동의 간호사, 직원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일터였다. 20대 초반에 받기 어려운 수준의 급여와 타 대형병원보다 쉬는 날(Off)이 많은 밤(Night) 근무를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3일 이상시키지 않는 근무 여건이었다.
하지만 주관적으로는 나쁜 곳이었다. 1살 터울의 바로 위 선배 중 하나는 출근해서 병동 물품이 빌 때마다 간호사실에서 장부를 내 눈앞에서 흔들며 오전 내내 바쁘게 일한 사람을 바싹바싹 태우기 일쑤였다. 하루는 물품을 찾아내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내 기억에는 찜질하는 물주머니였던 거 같다. 그 외에도 드레싱 하다가 인턴이 버린 가위나 집게를 찾으러 동분서주했던 날의 기억은 수도 없이 많다.
아주 높은 연차의 선배들 중 2명은 신규를 괴롭히는데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신규를 그만두게 만드는데 프로급이었고 나도 일정 기간 그녀의 타깃이 되었었다. 매 duty 사이에 전 번 근무자가 후임 근문자에게 인계를 진행하는데 그들에게 인계를 주는 날은 어떤 말을 해도 비난을 달게 받아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비난뿐만 아니라 인계 도중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화 수화기를 집어던지거나 쓰레기통을 발로 차거나 인계판을 (주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A4 사이즈의 판) 책상에 내려치는 일은 바로 옆에서 보며 인계를 완료해야 했다. 그들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전문적으로 하였고 한 번은 계단으로 불려 가서 대대적으로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간호사실에서 1:1로 혼나다가 내가 운 적이 있었는데 드디어 내가 눈물을 보였다고 좋아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곳에서 나는 일이란 것을 했다. 간호과를 다니는 동안 배운 지식과 국가고시를 위해 암기했던 모든 것들 중에 선배가 괴롭힐 때 대처방법이라든지 잃어버린 병동 물품을 잘 찾는 방법이라든지 혼났을 때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이라든지 퇴근해서 집에서 쉴 때 전화로 혼나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 같은 것들은 없었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 같은 신규 간호사는 해마다 들어왔고 나보다 더 심하게 당하는 신규들도 있었다. 그들도 모든 것을 스스로 습득해야 했다. 나와 동기들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런 모든 일들이 지나고 동기 몇 명이 떠나고 다음 연도 들어온 신규 몇 명이 떠나고 다다음 연도에 들어온 신규 몇 명이 그만두고 이상한 곳에서 일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저녁 근무(evening)나 밤(Night) 근무에 Charge 업무(병동의 환자들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업무)를 반 정도 맡게 되었다. 동기와 같이 근무하는 날은 마음이 편하고 저녁을 못 먹어도 퇴근 후 야식을 먹을 생각에 즐겁게 일을 했다.
어느 이브닝 근무 날, 병동에서 제일 유하고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선배 간호사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날 병동에 입원 중인 20여 명의 환자를 내가 담당했고 남은 30여 명의 환자를 선배 간호사와 후배 간호사가 팀을 이루어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날 초저녁 내가 맡은 병실에 신경외과 환자가 응급실을 통해 입원을 했고 당일 수술이 결정되었다. 유난히도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와중에 수술 준비를 해야 했다. 인턴 의사가 수술동의서를 받으러 왔고 수술 전 시행해야 하는 피검사를 진행해야 했다. 동시에 환자가 수술부위 제모를 하도록 안내했고 피검사를 하면서 굵은 정맥주사 라인을 잡아야 했다. 이외에 저녁 근무 번이 routine으로 해야 하는 없무도 같이 해야 했는데 그것들은 20여 명의 병실 환자의 활력징후 및 혈당 측정, 저녁 약 나누어 주기, 항생제 등의 주사제 놓기, 추가 처방 확인 등등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결과적으로 예정된 수술시간까지 신경외과 환자를 수술실로 내리지 못했다. 내가 피검사와 라인을 잡는데 2번 정도 실패를 하였고, 바빠 보이는 선배 간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까스로 피검사 bottle을 검사실로 내리고 정맥 라인을 잡아 수액을 연결하고 환자를 수술실로 내렸다. 수술이 끝나고 그 환자는 중환자실로 가는 것으로 연락이 왔고 늦은 저녁 그 환자의 주치의가 병동으로 올라왔다.
그 환자의 담당이 누구냐고 간호 station에 와서 반말로 선배 간호사에게 물어봤고 나는 올게 왔구나 싶었다. 내가 일하던 병동은 외과계이긴 하나 이비인후과, 성형외과, 흉부외과, 외과 환자가 주된 과였고 신경외과 환자는 잘 오지 않는 곳이었다. 하필 오늘 신경외과 병동에 자리가 없어서 우리 병동으로 온 응급수술이 잡힌 환자였던 것이다. 주치의는 수술실에 환자를 늦게 내린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예상컨대 수술을 같이 했던 신경외과 교수에게 많이 깨진 듯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가장 바쁜 시간이었지만, 모든 걸 제쳐두고 그 환자의 수술을 준비해서 예정된 시간까지 내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날 같이 일한 선배 간호사는 일을 하면서 대학원을 다니고 미국 간호사를 꿈꾸시던 자존감이 높은 분이었다. 내가 동기 외에 병동에서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내가 잘못한 일 때문에 신경외과 의사에게 하대 받으며 말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힘들었다. 반말로 시작한 신경외과 의사의 말에 가만히 있으실 분이 아니었다. 둘의 대화는 과열되었고 옆에 있던 후배 간호사는 대화까지 녹음을 했다. 나는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수술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고 해도 환자들 다 있는 병동에 와서 큰소리로 반말을 하며 간호사를 찾는 것은 상식적인 태도는 아니지 않냐고 선배가 따졌고 결국 너 나이가 몇 살이냐 너보다는 많다 등 쓸데없이 날 선 말들이 오갔고 그 신경외과 주치의는 우리 병동 수간호사에게 말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자기 분을 다 풀고 내려갔다.
그가 돌아가고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간호사실 화장실로 가서 한동안 울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배가 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은 게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오늘 한 모든 일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다른 환자를 보는 일을 동시에 하느냐고 그랬다고 해도 한 명이 20여 명의 환자를 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 한 명 환자의 수술시간을 지키지 못했고 내가 빨리 일을 하지 못해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어느 봄날 낮(Day) 근무를 마치고 수선생님에게 병원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선배 간호사들이 쓸데없는 일로 꼬투리를 잡고 혼내고 일을 못한다고 비난을 해도, 아침 6시 40분에 출근해서 밀린 일 하고 가라고 물품 찾고 가라고 해서 저녁 6시가 넘어서 퇴근을 해도 괜찮았다. 친한 동기들이 있었고 그들과 같이 병동 욕을 하면서 그럭저럭 잘 지냈었다. 내가 고생한 것보다 적게 느껴지는 월급이지만 맛있는 것을 사 먹고 사고 싶은 옷을 사고 다시 복닥거리는 병동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점심을 못 먹고 일해도 가끔은 환자들이 주는 음료수나 요구르트를 마시고 웃어 보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의 쓸모없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수모를 당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의 요구를 맞출 수는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고 그렇지 못한 자는 무능력한 거니까 그에 더해 내 무능력이 모두에게 드러나며 트러블을 만든 상황을 나는 결코 참을 수 없었다.
엄마는 결혼할 때까지만 병원에서 일을 하라고 했다. 좋은 간판이니까, 대학병원 간호사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며 결혼만 하면 그만두라고 했다. 당시 나는 남자 친구도 없었는데도 그렇게 말을 했다. 내 경험상 부모님 세대의 조언은 더 이상 조언이 아닐 때가 많다.
나는 병동 간호사로서 의미가 없어진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병원을 나왔다. 수습기간 까지 합하면 1달이 모자라는 4년을 채우고 이상한 곳을 걸어 나왔다. 그리고 한 달 동안은 집에 있는 가족 외에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갖지 않았다. 대신 무의미해진 나를 위해 다니고 싶던 아침 영어학원과 요리학원을 등록하고 매일 저녁 산책을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 숨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였던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