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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작자 May 03. 2023

회사를 나오던 날

안녕, 2번째 회사

비싼 택시를 불렀다. 카oo 택시 앱을 열고 잠깐 고민했지만 만원 정도 더 주고 갈만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내 돈을 주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간 날이 몇 번 있었다. 

외근을 갔다가 회사로 다시 온날(집에 가는 교통비를 회사 비용으로 청구할 수 있었음), 회사 근처에서 시행한 첫 번째 COVID-19에 양성 판정을 받은 날, 야근이 길어져 지하철을 타면 우울할 것만 같은 날.

그리고 오늘 마지막 퇴근길은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회사에 있던 개인 짐이 꽤 많았다고 남편에게는 말할 예정이다. 백팩을 메고 2개의 에코백을 손에 쥐고 A4상자 크기의 박스는 회사 앞 돌덩이에 올려 둔 채 택시를 기다렸다.


첫 CRO퇴사 날은 2021년 11월이었다. 야근을 하고 나오니 깜깜한 하늘에 몇몇 빌딩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밤의 기억을 핸드폰으로 찍고 지하철역으로 덤덤히 걸어갔었다. 


이번 주, 그러니까 오늘, 금요일에서 되돌아간 월요일부터 나는 묘하게 들떠있었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더 이상 오지 않는 CRC(연구간호사)들의 전화 때문일까, 나는 그저 내게 남은 일을 해나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업무들이 있었다. 정말 마지막 날인 금요일까지 해야 끝낼 수 있었다. 

CRA Contact Report 작성, IRB 심의서 업로드 그리고 follow up 하기로 했던 문서들.

물론 몇몇은 잊어버린 채 무시한 채 못본 척 한 것들도 있다. 착한 사람들도 거짓말을 하듯이 나도 적당히 나를 괴롭히지 않을 정도의 양심을 채운 채 일을 마무리 했다.


며칠 전에도 친한 회사 동료에게 그만 두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다고 말했었다. 마지막 주에 다다를 수록 수십개의 메일이 쌓여 있어도 편안한 상태로 그 중 몇몇은 삭제하는 그리고 대부분은 건성으로 읽는 정도의 호기는 부릴 수 있었지만, 마지막 날까지 계속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이라는게 실감나지 않았던 거 같다. 오늘이 마지막 이라는 것, 더 이상 이 회사에 이 자리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책상 위와 서랍 속, 캐비닛에 쌓여있던 문서들을 폐기하면서 현실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문서들에 남은 메모와 포스트잇의 흔적을 보면서 꽤나 열심히였던 나를 떠올렸다 이내 지웠다. 이제 더 이상 내게 필요하지 않은 정보들, 마지막 날까지 소중히 갖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무참히 폐기되었다. 

그중 혹시나 필요할 것만 같은 문서는 가방에 집어 넣었따. 아마 보지 않을 확률이 60% 이지만 종양 관련한 출력물과 기관(병원)의 모니터링실 및 IRB 사용 안내 서류들은 꽤 소중히 챙겼다. 


캔틴 내 냉장고에도 챙겨야 할 짐이 있었다. 지퍼백 하나에 먹지 않은 음료 몇 개와 홍삼젤리 그리고 사비로 산 진한 커피믹스가 들어 있었다. 선반을 열고 몇 번 사용하지 않은 텀블러도 챙겼다. 분명 텀블러 구매 버튼을 누를 때는 회사 근처 카페를 갈 때마다 들고 가서 할인도 받고 친환경적인 인간으로 거듭나자 했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외근이나 재택 또는 휴가를 쓰는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엔 매니저들이 회사에 거의 없다. 그들도 일주일 업무의 마무리는 집에서 하고 싶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금요일은 뭔가 헐렁하다. 덕분에 인사를 건넬 동료들도 많지 않았다. 그중 몇 명의 자리로 직접 가서 그날만 할 수 있는 말들을 나누었다. 고마왔던 점과 잘 있으라는 말 그리고 하지 않겠지만 연락하라는 말도....


퇴근 시간에 걸린 택시는 1시간쯤 뒤에 아파트 앞에 나를 내려줬다. 그리고 그날, 하필 리뷰를 믿고 시킨 맛없는 곳에서 온 배달음식을 먹고 꿀꿀해진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회사를 나오던 날은 이러했다.  

그러니까 벌써 5일이 지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아무렴 어떤가. 

동네 스타벅스에서 이어폰을 끼고 스타벅스 매장음악을 듣는다. 옆 사람의 전화 소리가 조금 거슬려 이어폰을 끼고 있다. 

그것 빼고는 이렇게 마음이 고요한 상태로 앉아 있는 것이 얼마만인지, 정말 겨우 , 아니 어떻게 얻은 귀한 시간인지 모르겠다. 마음 한편에서는 이제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커다란 통유리 창으로 아기 엄마가 아들을 힙색에 둘러멘 채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통화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기 얼굴을 영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휴대폰 귀에 댄 채 한 손은 아이를 토닥이며 전화 통화를 한다. 

이렇게 쓸데없는 문장을 길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꽤난 행복을 만끽 중이다.

이렇게 한가하게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나가는 차를 본다. 내 앞에는 회사 노트북이 아닌 개인 노트북이 자리를 잡고 있고 나는 잡다구레한 머릿속 목소리를 내키는 대로 쓰고 있다. 

행복에 겨운 날이다.

퇴사 5일째 입사 2일째이고 지금은 오후 다섯시 35분이다. 

(참고로 이직한 회사는 Core time이 10am 부터 4p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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