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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작자 Oct 12. 2023

달님이 커서 달이 되는 이야기

일상감상

의인화하는 말투는 모든 것을 인간인 나에게 대입해 뱉어 버리는 데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굳어진 버릇이다.


그런데  네 살 아이의 "왜 지옥"을 견디는 데는 의인화만 한 게 없다.


집 근처 산책로로 가는 길에 육교가 있고 난간 사이사이마다 거미줄이 늘어선 거미촌이 있다. 특히 저녁에 가면 거미줄 위에 나타난 집주인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구역을 지날 때마다 "왜?" 질문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렇다

"거미다! 여기도 여기도 있어."

"거미가  왜 나왔어요?"

"거미들이 밤이 되니까 나왔나 봐."

"거미는 왜 밤에 나와요?"

"거미들이 깜깜한 걸 좋아하나? 야행성인가"

"거미는 왜 깜깜한 걸 좋아해요?"

"어, 낮에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데 밤에는 깜깜하니까 사람들이 적어서 좋아하나 봐."

"거미는 왜 사람들이 적은 걸 좋아해요?"

"어, 왜냐면 사람들이 거미를 보면 으 거미 싫어하면서 괴롭힐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왜 거미를 싫어해요?"

"어 그러니까 그게...."


한 번은 산책길에 있는 공중 화장실에 아이와 아빠가 들어갔다 나오면서 안쪽 유리문에 붙은 송충이를 발견한 적이 있다. 흥분한 아이가 "왜" 발동을 걸었다.

"엄마, 송충이가 있어."

"어 진짜네 송충이잖아."

"송충이가 왜 여기 있어요?"

"아, 송충이가 밖이 어두워서 밝은데로 들어갔나 봐."

"왜 송충이가 여기 들어갔어요?"

"아, 송충이가 추워서 들어갔나?"

"왜 송충이가 추워서 들어갔어요?"

"어 밖은 바람이 부는데 화장실은 문이 있어서 바람을 막아주니까."

"아 송충이가 아이 추워 여기는 너무 추우니까 따뜻한 데로 들어가야겠다. 으. 했어"

"아 그렇게 했어(웃음) 그랬구나."


달님도 그랬다. 저 먼데 있는 빛나는 둥근 이 (때론 길쭉하지만 보름달을 좋아하므로)를 부르는 다정하며 일차원적인 말이다. 학원을 마치고 늦은 저녁 집으로 올라가는 얕은 언덕에도 달님은 있었고 주말에 엄마와 목욕탕으로 걸어가던 골목 어귀에도 달님은 있었다.

여기서 달님을 달로 바꾼 데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일이 끝나고 자정이 넘어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에서 그리고 차 안에서도 달은 고요히 떠있었고, 엄마의 전화를 무시하며 놀다 들어가던 새벽에도 달은 그 자리였다.

‘달’과 ‘달님’은 내게 ‘어른’과 ‘아이’ 같은 느낌이다. 달님이 커서 달이 되는 이야기랄까 아무튼 달은 일관성이 있는 편이다.


하나 해님과 태양은 낮을 상징 하며 다 같은 빛나는 무언가를 향한 표현이라지만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이를 인식한 계기는 얼마 전이다.

어느 날 아이의 티셔츠에 그려진 귀여운 행성 그림들에 대해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이건 지구, 우리가 사는 데, 이건 화성, 그리고 이건 태양, 태양은 그러니까 해야. 해님달님 할 때 해님이야.” 해님이 태양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들었다. 아마 네 살짜리 아이는 해님이 해님이지 갑자기 태양은 무슨 말인가 했을 것이다. 둘은 어감이 너무 다르다.


비록 해님이 태양이 되는 이야기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굳이 갖다 붙이자면 지금의 나는 귀여운 "해님"이어도 목표만큼은 거대한 "태양" 같은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이질적이지만 같은 것, 현재의 내가 꿈꿀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빛나는 존재가 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써놓고 보니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것도 참 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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