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현재를 살 수 있을까?

#소리와분노 #윌리엄포크너 #책 #문학동네

by 묭롶


[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매일 이렇게 꾸물꾸물

기록되는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어갈 것이며

우리의 모든 지난날들은

바보들에게 흙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밝혔다. 꺼지는구나, 꺼지는구나, 잠시뿐인 촛불이!

인생은 엑스트라의 그림자, 서투른 배우,

무대에 올라 뽐내며 걷고 안달하다가는

더 이상 들리지 않지. 그것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 ]




위의 글은 희곡 맥베스의 유명한 독백이다. 윌리엄 포크너는 그 자신이 [황혼]으로 구상했던 단편소설을

『소리와 분노』라는 장편으로 만들면서 이 소설의 제목을 맥베스의 독백에서 가져왔다.

짧은 소설로 작중 인물인 캐디를 보내기에 아쉬움이 남았던 포크너가


1. 벤지(캐디의 막냇동생): 1928년 4월 7일

2. 퀜틴(캐디의 오빠) : 1910년 6월 2일

3. 제이슨(캐디의 남동생): 1928년 4월 6일

4. 딜지(콤슨가의 하녀) : 1928년 4월 8일


캐디와 관련된 네 명의 화자를 각각의 섹션으로 구분하여 그들을 통해 캐디라는 인물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독자 스스로 구축하게 만들었다. 즉 캐디는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적 인물이지만 화자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건축가가 세운 네 개의 건축물에 새겨진 같은 문양의 돋을새김처럼 그녀는 각각의 다른 섹션

속의 존재하는 네 명의 인물들의 현재에 언제든지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이다.


같은 일을 동시에 겪은 사람들이 그 일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처럼 캐디라는 인물은 콤슨가에서 함께 지냈던 네 명의 인물과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은 모두 제각각이다.



벤지: 먼저 지능이 세 살에 머무른 막냇동생 벤지는 캐디를 차가운 나무 냄새(인동덩굴)로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베풀어준 존재의 부재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와 분노로 표출된다.

(벤지에게 1910년대의 누나 캐디와 1928년의 그녀의 딸 퀜틴을 구분하지 못한 채 시간의 구분 없이

다른 시간대가 현재에 함께 출몰한다.)


->{ 1910년의 캐디: “벤지. ” 캐디가 말했다. “찰리야. 찰리 몰라.” p63

1928년의 퀜틴: 이 머저리 미치광이, 퀜틴이 말했다. 러스터 너, 내가 가는 데마다

벤지가 따라다니게 둔다고 딜지한 테 말할 거야. 너를 흠씬 때려주라고

할 거야. p65 }


퀜틴: 이 소설에서 가장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는 인물은 콤슨가의 큰아들인 퀜틴이다. 그는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사는 인물이다. 자신이 순수하게 지켜왔던 과거를 한순간에 무너뜨린 캐디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현재를 잊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처럼 현재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고 말았다.


{ 캐디가 곧바로 거울 밖으로, 가득 쌓인 꽃향기 밖으로 뛰어나갔다.

장미꽃. 장미꽃. 제이슨 리치먼드 콤슨 부부가 결혼식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신부는.(과거에서 현재로 의식의 전환)-> 장미꽃. 그것은 산딸나무 꽃, 밀크 우드 꽃

같은 처녀가 아니러라. p103}


->과거의 그림자로 사는 자신을 현재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심

{ 아버지가 말했다. 인간은 자기 불행의 총합이다. 언젠가는 불행도

지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네 불행이야.

허공을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전선줄에 앉아 있는 갈매기가 질질 끌리는 듯했다.

좌절의 상징을 영원으로 가져간다고 하자.

그러면 날개야 더 크겠지만 아버지가 말하기를 다만 누가 하프를 연주할 줄 알겠니. p140 }



제이슨: 작중 인물 중 가장 세속 욕이 많은 인물은 제이슨이다. 형을 하버드에 입학시키기 위해 벤지의

목초지마저 팔았던 부모가 자신에게는 물려준 것 없이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게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그는 누나 캐디가 은행에 일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아서 자신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계속 지금의 현재가 아닌 주어지지 않는 미래를 살 수 있기를 희망하는 그는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렸다.


{ 젠장맞을 뉴욕의 유태인으로부터 시장 동향에 관한 통보가 없는 이십사 시간만

있으면 된다. 나는 그것으로 떼돈을 벌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 건 약아빠진 투기꾼들을 속이는 데나 쓰라지.

나는 내 돈을 건질 기회를 원하는 것뿐이다. p347 }



딜지: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콤슨가의 하녀 딜지는 현재를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언제나 아파서 누워있는

콤슨가의 마님도 그녀의 백치 아들도 날마다 분노에 차 있는 제이슨도 캐디가 낳아서 맡겨놓은 혼외자인 퀜틴 모두 그녀에게는 흐르는 물처럼 자신을 적시고 스쳐 지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딜지는 벤을 침대로 데려가 자기 옆에 끌어 앉혔다.

그리고 그를 안고 치맛자락으로 침을 닦아주며 앞뒤로 몸을 흔들었다.

“자. 그만, 딜지 할미가 있잖아.” p415 }



콤슨가에서 유일한 빛과 같았던 캐디가 떠돌이를 만나 아이를 갖게 된 사건이 몰고 온 파장은 각각 네 개의

섹션에 존재하는 네 명의 인물 제각각의 삶에 각인이 되어 버렸다. 돋을새김과도 같은 과거는 부지불식 간에 현재에 도드라져 올라와 현재와 섞이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오롯한 자신의 현재를 살지 못한 채 캐디가 있는 과거를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사는 현재는 실제로는 현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재는 그 인지하는 순간 곧바로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과거를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가장 미래지향적으로 보이는 제이슨 마저도 누나 캐디에 대한 원망 속에서 자신의 삶을 안쪽에서부터 파먹어 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으니 오히려 죽음으로 삶을 현재로 마감해버린 장남 퀜틴만이 유일하게 이 반복을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소리와 분노』의 작중 인물들을 보면서 과연 내가 사는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를 되돌이켜보게 된다. 사회성과 직업과 의무라는 소프트웨어가 탑재된 로봇?? 매일매일 반복된 삶을 살아가면서 뭔가를 꿈꾸고 있다고 믿지만 지금은 할 수 없다는 포기를 미리 포석으로 깔아놓은 희망들??? 어쩌면 말이 되지 않는 벤지의 끙끙거리다 터져 나오는 울음처럼 평생을 끙끙거림으로 전전하다 소리도 분노도 내지 못한 채 그림자로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포크너가 이 책의 제목으로 인용한 맥베스의 대사는 과거라는 주연에 맞춰 현재에서 리액션만을 취하고 있는 조연(그림자)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주어지지 않는 미래를 기다리다 분노로 가득한 삶을 살지 아니면 백치처럼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면 웃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는 울부짖으며 거부하든지 그도 아니면 리액션을 그만두고 현재를 죽음으로 마감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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