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구름이 떠 있다. 어떤 사람은 구름을 보고 양을 보기도 하고 같은 구름을 보고도 또 다른 이는 도넛을 떠올리기도 한다. 시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다. 시인이 써 놓은 심상의 이미지 위에 읽는 이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이미지를 덧씌운다.
젬블라 왕국은 러시아에 의해 멸망당했다. 러시아 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할 운명에 놓인 젬블라의 마지막 국왕인 찰스는 탈출에 성공해서 미국인 교수인 킨보트로 신분을 위장했다. 킨보트 교수(찰스 왕)는 교수로 위장한 채 위드스미스 학교에 교수로 부임했고 같은 대학교 교수인 시인 셰이드의 집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킨보트 교수는 이제는 없는 젬블라 왕국(이미 꺼져버린 왕국의 빛)의 고유성을 시인 셰이드가 구상하고 있는 시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시를 창작 중인 셰이드 교수가 자신이 전하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길 바라지만 막상 셰이드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확인한 셰이드의 시에 잼블라 왕국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써놓은 주석 속에 자신의 이야기(소설)를 들려줌으로써 셰이드의 시를 읽는 독자가 자신의 왕국을 떠올리기를 희망한다. 킨보트가 써놓은 주석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그가 왜 셰이드의 시 창작 과정에 그토록 집착했으며 시를 읽을 때 자신의 주석을 병행해서 읽기를 권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
창유리에 비친 거짓 창공에 속은,
나는 잿빛 솜털의 얼룩-그럼에도 나는
계속 살아서 날아다녔다, 창유리에 비친 하늘에서.
집안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둘로 만들곤 했다. } [창백한 불꽃 제 1편 p39]
80장의 카드로 이뤄진 셰이드의 시 [창백한 불꽃]의 중심 시어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이다. 그는 이미 죽고 없는 자신의 딸과 자신의 지나온 삶 전부를 이 시 속에 담아내었다. 딸의 죽음을 부정하고 죽은 이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자신의 삶을 담은 중심 시어에 킨보트 교수는 멸망해버린 젬블라 왕국을 투영시킨다. 자신이 투영하는 이미지를 함께 보여주기 위해서 킨보트 교수(찰스 왕)의 주석은 존재한다.
{ 1959년 5월엔가 6월에 저녁 산책을 하다 나는 셰이드에게 이 경이로운 소재를 다 제공해주었고,
그는 나를 짓궂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주 좋네, 찰스, 하지만 딱 두 가지 의문점이 남는군.
자네의 다소 소름끼치는 왕에 관한 이런 내밀한 사실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걸 자네가 어떻게 알지?
그리고 진실이라 하더라도,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를 그 삶들의 그런 개인적인 일을 어떻게 출판할
생각을 할 수 있겠나?"
~나는 다정하게 그리고 황급히 대답했다.
~일단 당신이 시로 변형하면, 사료는 정말 진실이 될 것이고,
그 사람들도 정말 살아 있는 게 될테니까요.
시인에 의해 정화된 진실은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해약도 끼치지 않아요.
진정한 예술은 거짓된 명예를 넘어서지요." } [창백한 불꽃 주석 p264]
{ ~나는 왼쪽 겨드랑이에 꼈던 봉투(셰이드의 시가 적힌 80장의 카드가 담긴)를
손 위에 올려놓고 엄숙히 무게를 달아보았다.
~나는 가슴에 젬블라 전체를 꽉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 [창백한 불꽃 주석 p357}
사실 무언가를 문학을 통해 구현해내려는 시인 셰이드의 시도와 구현된 문학 속에서 자신이 보려는 이미지를 보고자 하는 찰스 왕의 시도를 통해 나보코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점이다.
영화 [그레이트 뷰티]에서 많은 것을 가진 젭 감바르델라가 영화의 마지막에 들려주는 대사는
'쉿, 모두 다 거짓말이다.'이다. 문학이라는 허구의 거울에 비춰 우리 삶의 거짓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시+소설=[창백한 불꽃]이라는 수수께끼를 통해 나보코프가 보여주려는 진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살인사건으로 존경하던 동료 교수인 존 셰이드를 잃게 된 그의 이웃이자 동료 교수인 킨보트는 총 80장의 카드에 적힌 999행에 달하는 셰이드의 유작 시를 출간하기로 했다. 킨보트는 셰이드의 시를 출간하는 책의 머리글에 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 그 나름대로 주석을 마련했다며 말했다. 그는 셰이드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를 읽어가며 그의 주석을 병행해서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실제로 킨보트가 권한대로 시의 첫 행을 읽으며 뒷부분의 주석을 병행해서 읽기 시작한 나는 곧바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습관적인 게으름을 극복하고 집필을 시작하도록 그를 독려했다.
나의 작은 포켓 다이어리에는 이런 메모가 적혀 있다.
"그에게 영웅시격을 제안함"
"그 탈주 사건을 다시 이야기해줌"
"내 집의 조용한 방을 쓰라고 권함"
"내 육성을 녹음해두었다가 활용하는 것을 의논함",
그리고 마침내 7월 3일자 아래에는 "시를 쓰기 시작!"
나는 그 결과물이 창백하고 투명한 최종 단계에 이르러서는
내 이야기의 직접적인 반향이라 볼 수 없음을 안타깝게도
너무도 분명히 깨달았지만~ 아, 그렇다.
그 시의 최종 텍스트는 온전히 그의 것이 맞다. } p 103
킨보트는 셰이드의 유작 시를 출간하면서 존경하는 시인의 작품의 주석에 이 시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흡사 시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은 셰이드지만 그 창작의 재료(영감)를 제공한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왜 알리고 싶었을까? 이 질문들은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을 연구하는 작가들에게 수수께끼로 다가왔다. 그들은 이 의문에 대해 이 시의 실제 창작자에 대해 킨보트가 시와 주석을 모두 창작했다는 의견과 이 작품이 말하는 그대로 셰이드가 시를 쓰고 주석을 킨보트가 달았다는 주장과 셰이드를 살해한 그라두스가 이 작품의 창작자라는 의견으로 주장이 나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의 창작자를 놓고 벌이는 논쟁 중 세 번째 의견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 이유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1936년에 출간한 그의 소설 [절망]에서 찾을 수 있다.
1962년 출간된 [창백한 불꽃]이 시+소설=? 의 형태를 띤 반면 1936년 출간된 [절망]은 소설+소설=소설의 형태를 띤다. [절망]은 자신의 사망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완전범죄를 계획했던 '나'가 계획에 실패한 뒤 경찰에 쫓기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소설로 써서 그간의 과정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형태를 취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작중 인물인 '나'가 쓰는 소설(보험금을 타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든 후 자신을 닮은 사람을 살해하고 그 사람으로 신분을 세탁 후 부인을 통해 자신의 사망 보험금을 수령해서 새 삶을 살고자 했던 나의 이야기)이 실제 소설의 내용인지 아니면 이 소설이 [절망]이라는 소설을 쓰는 작가를 작중 인물로 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의 작품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소설이라는 허구의 산물이지만 그 경계선의 모호함이 가져오는 혼란은 이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무수히 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낳게 한다.
(독자는 액자 속의 그림을 주체로 봐야 할지 그 액자 속의 그림을 보고 있는 작가가 포함된 또 다른 큰 배경까지를 보아야 하는지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 이런 날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저께 같은 날이다.
두 번 정도 잠깐 쉬었다가 내리 열아홉 시간을 글을 썼다.
~이제 이야기는 끝나가고, 덧붙일 게 거의 남지 않은 지금,
이 다 써버린 종이와 작별하자니 몹시 아쉽다. } [절망] p218
{ 그리고 이제 나 자신이 기묘한 반복으로 가득한 작센의 마을로 부드럽게 빠져들었다.
그러자 분신이 살며시 일어나 나를 맞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를 에워싸서 포로로 붙잡았다.
그러자 그는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계획을 포기하는 척했다.
그러자 이야기가 창조자에게 지속과 종결을 요구하며
뜻밖에 다시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침대에 앉아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페이지를,
도대체 내가 쓴-아니다, 내가 쓴 게 아니다,
내 기이한 협력자가 쓴 것이다 ~} [절망] p224~225
그런 의미에서 [창백한 불꽃]의 창작자 논쟁에서 셰이드를 살해한 그라두스를 창작자로 하는 의견을 기준점으로 놓고 볼 때 1962년에 출간된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은 1936년에 출간된 그의 전작인 [절망]의 확장판에 해당된다. [절망]에서 '나'가 나와 닮은 자를 살해한 이야기를 소설의 형태로 적었다면 [창백한 불꽃]은 셰이드가 쓴 '시'를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삼아서 기존의 작중 인물이 쓰는 소설보다 더 확장된 외연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분량만 놓고 보더라도 작중 인물이 쓰는 소설을 다룬 [절망]보다는 살해된 셰이드가 쓴 시에 주석의 형태를 띤 소설로 부연설명을 한 [창백한 불꽃]은 그의 전작보다는 장편이다. 창작자를 누구로 놓고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이 소설은 실상 창작자의 정체가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나보코프가 진짜이기 때문이다. 여러개의 해를 지닌 방정식처럼 거짓과 오답 그리고 착각이 난무하는 삶 속에서 진짜를 찾으려는 시도를 해야할 필요성을 이 작품을 통해 깨닫게 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