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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인치볼드의 [단순한 이야기]는 1791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신의 후견인으로 지정된 도리포스 신부에게 의탁된 열여덟 된 밀너양을 주인공으로 한다. 근대 소설의 큰 특징인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밀너양이 자신의 후견인인 도리포스 신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도리포스도 그녀의 감정을 알고 난 후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어 결혼이 성사되는 전반부와 작위를 계승하여 엘름우드 백작이 된 도리포스 신부와 밀너 부인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나는 인치볼드의 [단순한 이야기]를 읽으며 1813년 출간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1847년에 출간된 살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그리고 1900년대의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얘기하는 여성 문학의 계보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는 정확히 제시되지 않았지만 그 계보의 윗자락에 엘리자베스 인치볼드의 [단순한 이야기]가 위치함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선두 주자가 없었다면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 조지 엘리엇은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익스피어는 말로가 없었다면,
말로는 초서가 없었다면, 초서는 그 이전에 길을 열고 자연적 언어의 야만성을
순화한 잊힌 시인들이 없었다면 글을 쓸 수 없었겠지요.
왜냐하면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지요.」<자기만의 방> P101
엘리자베스 인치볼드와 제인 오스틴, 살럿 브론테의 작품 속 배경은 동일하다. 그들은 사회제도적으로 감금된 채 종속적인 존재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에 담고 있다. 인치볼드의 작중 인물 밀너 양은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 재산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도 후견인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존재이다. 다행히 밀너양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결혼을 했지만 오해로 인해 남편의 사랑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의 불행을 딸에게 대물림하고 말았다. 어차피 대물림하지 않았더라도 밀너부인의 딸 역시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서 독립성을 지닐 수 없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부유한 다아시는 가진 것 없는 엘리자베스 베넷에게 이끌리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게 되지만 주변의 반대가 엄청나다. 공무원의 급수에 따른 업무의 배당처럼 여성은 자신의 태생적 지위에 의해 같거나 비슷한 등급의 남성과의 결혼이 사회 통념상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살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도 작중 인물에게 사랑이 허락되는 건 남성에게 살아있는 미친 아내라는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여성작가들의 작중 인물들은 가장 자존감이 확실해 보이는 [오만과 편견]의 베넷양마저도 다아시를 향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는 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만큼 작중 인물
모두가 자존감의 상실을 드러내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의 자존감 상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다. 그 첫 번째는 경제적 빈곤이고, 두 번째는 정서적 빈곤이다. 버지니아는 여성이 처한 종속성의 세계(혈연, 결혼, 자녀 등)가 여성의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며, 자신의 역할에 대한 충분한 보수가 없는 무급의 희생이 자존감을 말살하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에서 나는 19세기와 20세기를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이 스스로 경제적인 자립을 이룰 수 없고 자신에게 상속된 재산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여성에게 허락된 돈벌이라고는 가정교사밖에는 없다는 현실 속에서 결혼은 선택이 아닌 불가피한 방법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딸에서 딸에게로 대물림되는 모습들이 그녀들의 작품 속 인물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이제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앞선 시간을 살아갔던 여성들의 목소리들은 여성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남성과의 동일시는 해답이 될 수 없다.
과격한 페미니즘이 향하는 무조건적인 동일화와 공평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방법이 되지 않는다.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의무와 사회에 대한 올바른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가 될 것이다.
「~전 단지, 제 자신의 의견에 따라,
영부인이건 혹은 저하고는 관계없는
누구의 의견이건 상관하지 않고,
제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행동할 작정일 뿐입니다."」[오만과 편견] p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