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미호 씨.

2화. 여우구슬

by 묭롶

미호 할머니가 복순 할머니의 깎은 손톱을 먹고 나자 건넌방에서 잠이 든 미호의 가슴 위로 푸르스름한 빛이 일기 시작했다.


'어머, 저기 복순 할머니 아냐?'


미호의 꿈속에서 복순 할머니는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어둑신한 냉골 방에서 어린 복순과 동생은 일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해 뜨자마자 일감을 찾아 나선 엄마가 두고 간 고구마 두 개로 하루를 보낸 복순과 동생은 너무 배가 고프고 오지 않는 엄마가 걱정이 돼서 곧 울음이 터질 것 만

같았다.


"아고, 내 새끼들 많이 기다렸제."


목에 둘러맨 무명 수건을 풀며 방문을 열고 들어온 복순 엄마는 방에 호롱불을 켰다.


"엄니, 나 배고파."

"그려그려 내 새끼 엄마 얼른 고구마 삶아올게."

"또 고구마여? 다른거.. 응?"


어린 복순과 동생의 투정에 복순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복순엄마는 도망치듯 아궁이가 있는 부엌으로 나왔다. 언제 투정을 부렸냐는 듯 삶은 고구마에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며 복순엄마는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엄니는 왜 안 묵어?"

"응, 엄니 밖에서 묵고 왔당께."

"피, 엄니만 맨날 혼자 맛난거 묵고."


불이 꺼지고 아이들이 잠든 것을 본 엄마는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갔다. 나가는 엄마를 보고 잠이 깬 어린 복순은 엄마가 또 혼자 뭘 몰래 먹나 싶은 마음에 몰래 엄마 뒤를 쫓았다. 아닌 게 아니라 엄마는

달밤에 장독대로 가더니 장독을 열고 무언가를 건져서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칫, 나가 그랄 줄 알았제잉. 혼자만 맛난거 묵고....'


냉큼 엄마를 붙들어 잔뜩 화를 낼 요량이던 복순의 눈에 장독대에서 싱건지 속 얼은 무를 건져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먹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몰래 방에 돌아와 자는 척 누운 복순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나왔다.


'그러지 말걸, 엄니, 미안혀... 엄니... 미안쿠만....'


꿈을 꾸는 미호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달빛이 비치는 방 안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미호 할머니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 오백 년 전 구미호 일족은 인간의 정기를 취해 생명을 이어갔다. 인간들이 명부에 적힌 수명에 따른 반면 구미호는 그 수명을 여우구슬에 담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고 미호 할머니도 그렇게 오백 년을 살았다.

인간들도 생존을 위해 육식을 하고 산속에 사는 맹금들도 생존을 위해 살생을 하는데 소수의 인간을 취했다한들 무슨 잘못이냐며 구미호들은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자신의 걸음에 개미가 밟힐까 노심초사하며 걸음을 떼지 못하던 백련대사의 모습을 본 미호 할머니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가르침을 구하는 미호 할머니에게 백련대사는 백송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동안의 살생의 업을 천년 동안 풀어가라고 말했다.

이후 백송은 구미호 일족을 떠나 홀로 여우굴에서 동면에 들어갔다. 동면에 들어간 백송의 몸에서는 나무

한그루가 솟아 나왔다. 나무의 수령이 오백 년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나무를 백송령이라고 불렀다.


'구미호일 때 그토록 많은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고도 정작 사람은 몰랐는데......'

나무가 되어 동면에 들어갔을 때도 그 많은 계절과 그 많은 시간이 나를 스쳐갔지만....

몰랐던 인간을 이리 많이 알게 되다니....'

이리 아프고 약한 것이 인간이라니...

아니다. 여기서 약해지면 안 된다....

일 년은 더 저 아이를 지켜야지...'


'그러고보니 저 아이는 신기하게도 지 애미를 안 닮았네.'


삼십이 년 전 만월의 밤 백송령 앞에 주저앉아 울부짖던 세화의 모습과 그녀가 안고 있던 어린 핏덩이의 까만 눈동자가 눈앞에 선했다.


'어쩌자고 이런 인연을 만들었을까. 어쩌면 이게 내 마지막 업보일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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