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생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을 본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여운이 가시질 않아서 일상을 지내던 중간에 문득문득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수면 아래 돌을 매달아서 던져놓은 무언가가 자꾸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애써 묻어두고자 했던 감정의 덩어리들이 소화되지 못한 채 내 명치에 머물렀다. 그래서 <기생충>에 대한 후기를 스포일러 없이 적 고난 후 누적관객수가 천만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지난 리뷰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를 가장 좋아하지만 이처럼 오래 마음에 머무는 영화는 <그레이트 뷰티> 이후로
<기생충>이 오랜만인 것 같다.
탄성을 지닌 고무줄도 세게 당기면 끊어진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에서 우리는 넘지 말아야 할 한계선을 넘은 탄압이 반란과 혁명의 도화선이 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만 놓고 보더라도 생존이 가능한 수준 이하로 식량 배급이 제한되고 통제가 강화됐을 때 열차의 맨 뒷칸에 있던 계급들은 도끼를 들고 열차의 앞 칸을 향해 유혈투쟁을 시작했다.
조선시대를 놓고 볼 때 자연재해로 인해 식량난이 가중되고 그 와중에 전염병이 돌고 거기에 더해서 탐관오리들까지 설칠 때 민초들은 한 손으론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나머지 손으로는 낫을 쥐었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는데 사회적 구조가 개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없을 때 개인은 어떤 선택지를 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선택지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같은 햇빛이 들지 않는 기택 가족의 반지하와 같은 삶이 지속된다면 자포자기와 자신을 향한 분노는 눅눅한 습기처럼 그들을 좀먹어 들어갈 것이다.
<기생충>을 본 후 나는 왜 기택이 박사장을 굳이 죽였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인데 죽였다. 우발적 살인이니 미필적 고의니 심신 미약이니 살인에 대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 영화 <기생충>에서의 살인은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전작 <설국열차>에서 최하위 계급이 최상층을 향해 치닫는 유혈투쟁 과정처럼 <기생충>에서의 살인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박사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택과 같은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도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영화 속에서 박사장은 여러 번에 걸쳐 선을 넘지 말라는 말을 한다. 그건 역으로 따진다면 박사장 자신도 누군가의 선을 넘는 순간 응징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난 기택의 살인이 ‘헤르만 헤세’의
<환상동화집>에 수록된 [난쟁이]의 살인사건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다사레는 지독한 욕설을 퍼부으면서 있는 힘껏 강아지를 걷어차
물속 멀리 빠뜨려버리고 말았다네.
~”제발 부탁합니다. 곤돌라를 띄워주세요.”
~”피노를 구해 주세요, 아가씨, 당장! 물에 빠져 죽겠습니다.! 오, 피노, 피노!
~그는 한 시간 이상 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 묘약은 독약이었으니까 말이야.
~그것은 강아지의 죽음에 대한 필리포의 복수였어.} <난쟁이> p23~37
마르게리타 아가씨의 노예였던 난쟁이 필리포는 아가씨의 약혼자에 의해 자신이 아끼던 강아지 피노가 죽게 되자 약혼자인 발다사레에게 독극물이 든 포도주를 먹여서 독살하고 그 자신도 죽고 말았다. 영화 <기생충>에서의 살인은 인간에게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우화’와 같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직접 화법 대신 꾸며진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는 우화처럼 영화 <기생충>의 뒷 맛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