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J.M.쿳시 <청년시절>

모든 문학은 허구다. 그것이 자전소설일지라도............

by 묭롶
275F153A53A281B61DB7CA
272D6C3353A2824D3AB110



영화 <그레이트 뷰티>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젭은 "그 모든게 거짓말이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65세 생일을 맞은 젭 가파르딜라는 보편의 기준에서 볼 때 부러울게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힘과 부 그리고 능력에 자신의 계급에 맞는 패션센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친구들까지..... 그런데 그가 그런 그가 말했다. 그 모든게 거짓이라고........


<문학은 허구다>


J.M. 쿳시의 자전소설 삼부작은 <소년시절>, <청년시절>, <서머 타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을 두고

자서전으로 봐야하느냐는 질문에 존은 답한다. 이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허구가 가미된 소설이라며

작품 속 내용을 작가와 동일시 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인간의 기억이 왜곡되어 있다는 연구결과처럼 자신이 겪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사실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순간 그건 100%의 논픽션이 아닌 어느정도 허구가 가미된 픽션이 되고 만다. 그것이 비록 사실관계를 전하는 기사일이라도 그 기사를 쓰는 사람이 미치는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단순한 서사적 형식은 예술가가 서사적 사건의 중심체로서의

자기자신을 연장하고 심사숙고할 때 서정문학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지. ~이렇게 되면 서술도 이제는 순수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야. 예술가의 개성은 서술 그 자체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마치 생명력 있는 바닷물처럼 인물과 행동의 주위를 돌고 돌며 흐르게 되지. ]

<젊은 예술가의 초상> p330


소설(허구)을 논픽션(사실)으로 받아들여 작품 속의 내용을 작가에게 억지로 덮어씌우는 프랑스 문단과 독자들에게 로맹 가리는 평생을 시달려야 했다.

J.M.쿳시의 자전소설 삼부작을 번역한 역자도 평소 자신의 사생활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존이 쓴 소설이

자전소설의 성격을 띤다고 해서 그걸 존 그 자체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성당을 떠날 수 있었다.

~바로 그 죄만 아니라면 무슨 죄라도 괜찮았을 텐데!

차라리 살인죄였더라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는 이글거리는 고운 재처럼

창피가 온통 그를 뒤덮었다.

그걸 말로 표현해야 하다니!

그의 영혼은 숨이 막혀 어찌할 줄 몰라 죽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 <젊은 예술가의 초상> P220


「~도대체 살아서 뭐 한다는 말인가?

필립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자문해 보았다.

산다는 게 온통 허망하게 여겨졌다.

~노력과 결과는 전혀 맞아들지 않았다.

젊은 시절 빛나던 희망을 가졌던 대가는 쓰라린

환멸뿐이었다. 고통과 병과 불행의 비중이 너무 무겁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았다.

~그는 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이런 비참한 실패를 맛보아야 한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조건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또 어떤 사람들은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도 실패한다.

만사가 순전히 우연이란 말인가.」<인간의 굴레에서> P(2권 363)


[헨리 제임스의 감성은 그의 감성보다 뛰어나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실패가 모두 설명되지는 않는다.

제임스는 대화, 즉 말을 주고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는 그 신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신조를 따를 수 없다.

무자비한 톱니바퀴로 그를 부숴버리는 런던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이 도시에서 글쓰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여기에 와 있겠는가? ] p108


20190622_160650.jpg
116A091A498EEF7E1B1105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과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어찌보면 <청년시절>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와 같은

자전소설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결핍된 환경(스티븐은 식민지인 아일랜드 태생에 시력이 약함, 필립 케어리는 고아에 기형적 다리, 존은 무능한 아버지를 둔 아프리카너라는 태생적 한계)을 지닌 작중인물들이 자신들의 꿈을 찾는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다룬다는 점이다. 이들 작중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지닌 결함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인물들이며 작품 속 스토리텔링의 일부는 작가의 삶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J.M.쿳시의 경우처럼 그 작품들을 자서전으로 분류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두 작가 모두

그건 ‘소설’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 세 작품들의 공통점에 비춰볼 때 문학은 이미 만들어진 재료(삶)의 재가공에 해당하는 작업이며 또한 기존의 결과물을 놓고 새로이 펼치는 실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사람은 두 번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삶이라는 레고 완성품을 해체하여 그 블록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예술이란 말이야} 스티븐이 말했다.

{미적인 목표를 위해 감각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을 인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지.~}]

<젊은 예술가의 초상> p319


[치료는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치료의 목적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행복한 사람들은 흥미롭지 않다.

불행의 짐을 받아들이고 그걸 시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무언가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게 더 낫다.

그는 그렇게 믿는다. ] p29


물론 J.M.쿳시의 작품 표현처럼 레고를 분해해서 새로운 조합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사자 주변에서 앵앵거리는 모기처럼 많다. 그렇지만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뭔가를 시도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존재라는 점을 나는 <청년 시절>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J.M.쿳시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언제나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청년 시절> 속 존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지리멸렬한 삶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써내려가는 저마다의 작가이다.

<청년 시절>의 존처럼………


Ps: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작중인물 스티븐이 느끼는 소명의식과 <청년 시절>의 존이 느끼는 소명의식이 닮은 꼴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존은 제임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그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아직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목표가 그를 인도하여

은밀하니 길을 따라 도망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p255


[우연은 그에게 어떤 축복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이란 예측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연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

언젠가 우연이 그에게 미소를 지어줄 날이 옷 것이다.

그는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 p181

keyword
작가의 이전글로맨틱펀치 와의 예순세 번째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