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미호 씨.

10화. 일촉즉발(一觸卽發)

by 묭롶

미호가 좋아하는 계란물을 입힌 두부를 지져서 저녁을 먹이고 아이를 이제 막 씻긴 백송이 저녁 설거지를

하러 싱크대에 선 순간 그녀는 이십 리 밖에서 큰 무당의 기운을 느꼈다. 지나가는 기운이라면 다행이지만

결계가 약해진 지금은 너무나 위험했다. 미호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백송의 예지력이 강력한 위험을 예고하고 있었다.


'삽살, 당장 오너라. 미호가 위험하다.'


아들 동현에게 빵과 우유를 주고는 자신은 편의점에서 방금 사 온 소주를 잔에 한잔 따르려던 순간 백송의

전음이 희수의 귀에 들려왔다. 노인네는 무시하고 말겠지만 아이가 위험하단 말에 희수는 아들에게 잠깐 TV를 보고 있으라고 말하곤 급히 겉옷을 챙겨 입고 미호의 집으로 향했다.


급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희수의 모습에 백송은 그간의 노여움보다는 어서 결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마음이 시급했다. 미호를 작은 방에 들여보내고 거실로 들어온 희수에게 다짜고짜 손톱깎이부터 들이민 백송에게 놀란 희수는 그저 그녀가 시키는 데로 손톱을 깎았고 쟁반에 모은 손톱을 들고 백송은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깎은 손톱으로 뭘 하는지는 모르는 희수는 도대체 무슨 위험이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희수의 손톱을 받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온 백송은 손톱을 보고는 순간 흠칫했다. 씻지 않은 손으로 여기저기 벅벅 긁어댔을 때가 낀 손톱을 보는 순간 그녀는 이대로 방문을 열고 나가 희수의 정기를 빨아 말려버릴까 싶었지만 상황의 시급함 때문에 두 눈을 딱 감고 그것을 취했다.

궁여지책으로 결계를 회복한 백송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거실로 나와 희수를 노려봤다.


"아니, 어르신 제가 어르신 말 들어서 로또가 됐습니까?

그도 아님 복을 받았습니까. 왜 주시는 것도 없으면서 저를 부르시냐고요."


눈도 못 마주치면서 볼이 퉁퉁 부어 대거리를 하는 희수의 모습에 백송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아. 내가 복을 내리는 재주가 있었으면 진즉 성불했지 이러고 있겠냐."

"어이구, 이놈아, 자기 팔자 다 자기가 만드는 거고 다 내 탓인걸 넌 왜 모르느냐."

"떠난 인연에 미련 갖지 말고 동현이랑 잘 살 생각을 해야지, 어린것이 뭔 죄가 있다고...."


혀를 차는 백송의 말에 더는 대꾸하지 못하는 희수가 뻘쭘하게 일어나 거실을 나서려는데 작은방에서 스케치북에 할미를 그리고 있던 미호가 그런 희수를 보고는 방싯 웃었다. 미호의 웃는 모습을 본 희수는 혼자 있을 동현이 생각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눈시울이 확 붉어졌지만 헛기침을 하며 마당으로 나온 희수는 대문을 나서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희수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여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내뿜은 담배 연기 사이로

앞에서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두어 발자국쯤 걷자 위로 걸어 올라오는 여자의 모습이 더 자세히

보였고 희수는 갑자기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숨 막힐듯한 아름다움이 바로 희수의 눈앞에 있었다.


"어머, 잘생긴 오빠 어디서 나오는 길이야?"


백두가 묻는 순간에도 희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에.....그러니까. 제가 동네 어르신을 뵙고 가는 길인데..."


"아하핫핫, 어머 오빠 참 착하다. 엄마도 아니고 이 시간에 부른다고 오고가고...

어떤 어르신인지 나도 참 궁금한데."


희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건네는 은근한 백두의 부탁에 희수는 이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에 판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별거 없어요, 그냥 노인네와 아이가 사는 집이에요."


"그러니까 오빠 손 잡고 나도 그 어르신 한 번 뵙고 싶다고...응?"


백두는 내민 손을 바라본 희수는 그 즉시 들고 있던 담배를 땅에 버리고 신발로 비벼 끈 다음 바지춤에 손바닥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망설이는 희수의 손을 냉큼 백두가 잡은 순간 희수는 홀린 듯 미호의 집 대문을 열고 백두와 함께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백두는 희수의 손을 뿌리쳤고 희수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어멋, 이래서 내가 못 찾았구나."


백두의 두 눈에서 푸른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 순간 출입문을 열어젖힌 백송의 두 눈동자에 붉은 고리가 활활 불타올랐다.

희수의 눈에는 경국지색이었지만 백송의 눈에 백두는 주어진 사명도 거부한 채 스스로 신이 돼버린 흉악한

악신 그 이상이었다. 거기에 백두의 가슴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자색 기운은 자신이 수행을 위한 동면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여동생 자홍의 것이었다.

천년 넘은 수행을 마치지도 못하고 세화의 부탁 때문에 세상에 다시 나왔을 때 백송은 자신의 구미호 일족이 자신만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저 세상이 변해서 이 땅에 뿌리 뻗지 못하고 도태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백두를 만난 지금 자신의 동족을 멸족시킨 원흉이 바로 백두란 사실을 확인하게

된 백송은 두 눈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삽살의 손을 잡고 결계를 넘은 백두 때문에 미호의 가슴에 담아둔 여우구슬이 뜨거워졌는지 울음이 터진 미호가 백송을 찾아 그녀에게 다가왔다. 놀란 백송은 아이를 제 뒤에 감추기 급급했다.


"어머.. 이건 또 뭐야?"

그래서 여우구슬이 너한테 없었구나... 아.. 진짜.. 나 고민되네..

백지수표인 수명(壽命)을 골라야 하나 여우구슬을 골라야 하나...."

"아이, 그래도 내가 어떻게 지켜온 얼굴인데 못난이로 수만 년 사는 것 보다야 난 여우구슬이지."


무서워 떨며 자신의 옷자락을 붙들고 울고 있는 미호의 울음소리를 듣는 백송의 마음은 미칠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고 싶은 분노가 가득 차오른 순간 백두가 미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미호를 뒤에 숨긴 백송의 하얀 머리카락이 칼날처럼 허공에 솟구쳤다. 백송이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린

순간 그녀의 오백 년 내력이 벼락이 되어 백두를 때렸다.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뇌우가 번쩍하는 순간

백송령은 쿵 소리를 내며 상단부의 삼분의 일 정도가 쪼개졌다. 백송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흰 머리카락이 피로 물들었고 벼락이 치는 순간 희수는 기절하고 말았다.


천년 먹은 여우구슬을 탐하던 백두는 벼락을 맞고 온몸의 피부가 녹아 들러붙어 버렸고 그동안 다 써버려서 비어버린 여우구슬의 팔 할이 깨지고 남아있던 자홍의 정기마저도 대부분 잃어버려서 불에 탄 숯 검정이 되어 버렸다. 그 몸으로도 대문을 빠져나간 백두를 대기하고 있던 칠(七)장로가 차에 태워 현장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