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야, 다시 생각해 봐."
교복을 입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미호의 뒤에서 희수가 말을 건넸다. 구부러진 신발 뒤축을 손가락으로 빼낸 미호가 고개를 돌려 걱정 어린 희수의 얼굴을 보고 씩 웃었다.
"아냐. 내가 원하는 거야."
미호에게 다가온 희수가 한숨을 쉬었다.
"너희 담임이 어제 전화를 했어, 이대로 정말 의대 안 보낼 거냐고."
"아이고, 삼촌 나 늦었어... 나 ... 간다.. "
다급히 현관을 빠져나가는 미호의 뒷모습을 보는 희수는 다시 한숨을 내 쉬었다.
'동현이 놈은 공부를 안 해서 문제고 미호는 ....'
안방에서 바깥소리를 듣던 백송은 가슴이 답답해서 끙 소리를 냈다. 십삼 년 전 백두와의 결전 이전에는 자신이 미호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이후로 역으로 미호가 자신을 돌보고 있음을 느끼는 백송이었다. 이번에 의대 대신 간호대학을 가겠다는 결심 또한 자신 때문임을 알기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세화가 자신에게 아이를 맡겼던 그날 자신의 품에 안겨 그녀를 올려다보던 그 까만 눈동자와 그녀의 손가락을 잡던 연약한 손가락이 지금도 눈앞에 선한데 그 순간부터 자신을 할미로 여긴 듯 항상 곁을 내어준 미호는 백송이 천년 수행을 통해서도 가질 수 없었던 가족이었다. 천년 전에도 백송에게는 자매가 있었고 일족이 있었지만 그들은 동족이자 경쟁자였다. 백송은 미호와 함께 하면서 미호가 갖지 못한 건 수명이지만 자신이 천년 넘게 갖지 못한 것이 마음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십삼 년 전 백두가 벼락을 맞고 도망간 이후 희수는 술을 끊었다. 벼락이 백두를 때리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희수는 눈앞에 펼쳐진 모든 사태가 자신으로 인해서 벌어졌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눈을 뜨자마자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는 백송과 그녀를 붙들고 울고 있는 미호가 보였다. 놀라서 다급히
백송을 일으켜 병원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귓가에 희미하게 들리는 소용없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백송을 안방으로 옮겨 눕히고 물수건을 만들어 그녀를 닦았다. 자신이 백두의 손을 잡고 대문을 넘지만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인데 뒤늦은 후회에 희수는 눈물이 흘렀다.
그날 이후 희수는 아들 동현을 데리고 미호의 집으로 들어왔다. 백송은 이제 방문 밖을 나설 힘이 없었다.
한 달 여가 지나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그녀는 장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희수를 가사도우미로 들이겠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 남도의 세습무였던 미호의 집안은 땅이 많았다. 광역시의 경계가 확장되면서 광역시로 편입된 세습무 지리의 땅들에는 건물들이 들어섰고 매월 들어오는 월세며 각종 세금 처리를 위해서도 장변호사는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세습무 집안의 각종 행정적인 업무와 송사를 조선시대 때부터 도맡아 처리해 온 곳이 바로 장 씨 집안이었다.
백송의 연락을 받고 집에 찾아온 장변호사는 백송의 상태를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했지만 세화가 죽기 전 날 자신에게 전화를 해서 혹 자신이 잘못될 경우에도 아이는 보육시설에 맡기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성년이 될 때까지 돌봐달라는 말을 남겼기에 당장은 백송의 말대로 희수를 도우미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동안에도 백송의 부름을 받고 집을 다녀가곤 했던 희수였기에 미호는 그와 그의 아들 동현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희수는 백송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아들처럼 어미 없이 자라는 미호에 대한 연민이 더해져 자신이 먼저 집에 들어와 백송 대신 미호를 돌보겠다고 말했다.
희수는 미호와 아들 동현의 소풍 도시락을 쌌고 아이들의 운동회에 갔으며 아이들의 졸업식 날에는 셋이서
함께 사진을 찍고 자장면을 먹었다. 미호는 그런 모든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안타까웠다. 그녀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집으로 가기 전 윗부분의 삼 분의 일이 쪼개져서 더는 잎사귀도 꽃도 피우지 못한 채 고목이 되어버린 백송령 앞에 한참을 서 있곤 했다.
'꼭 우리 할머니 같아.'
동네 사람들은 말했다. 하늘에서 큰 벼락이 떨어지던 그날 이후로 백송령은 죽은 것 같다고....
문화재 보호청에서는 철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영양제와 수액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지만 백송령은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백두를 막아내느라 오백 년의 공력을 써버린 백송은 이제 희수의 손톱만으로는 결계 뿐만 아니라 나무로부터 분리된 자신의 본체를 유지하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덕분에 희수는 언제나 손톱이 자랄 겨를도 없이 항상
손톱이 바투 깎인 채였지만 그렇다고 그걸 밖에서 쉽게 구해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집에서 함께 살게 된 희수삼촌이 할머니에게 자른 손톱을 갈무리해 드리는 걸 본 미호는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할머니에게 손톱이 필요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미호가 주말마다 동네 노인정에 다닌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다. 이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노약자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봉사를 다니게 되었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 짝꿍이었던 급우에게 손톱을 깎아주겠다고 말했다가 학교로 쫓아온 그 아이 엄마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미호는 보호자가 없는 노인들을 찾아다녔다.
백송은 미호를 위해 삼십삼 년 삼월 삼일 동안 그녀를 지키겠다는 사명으로 그녀를 맡았지만 이제 상황은 미호가 백송의 본체를 지키는 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의대를 가기에 충분한 성적이었지만 미호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를 지킬 수 있는 쪽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