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미호 씨.

12화. 꽃 피는 봄이 오면.

by 묭롶

"다녀왔어요."

"어, 그래 오늘도 고생 많았지."


간호학과에 입학해 삼 학년이 된 미호는 이번주부터 대학병원으로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워낙에 텃세가 심하고 위계서열을 많이 따지는 간호계열이기에 희수도 백송도 미호의 실습을 앞두고 걱정이 많았다. 손톱이라도 취할 수 있다면 일과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알 수 있을 테지만 무수명인 미호의 손톱은 아무 소용도 없었기에 백송은 마음이 답답했다.

여우구슬을 품고 사람으로 둔갑해서 백두대간 사방팔방을 휘젓고 다녔던 과거였다면 내 손녀를 괴롭히는 것들은 당장에라도 쫓아가 날벼락을 때리겠지만 방문턱도 못 넘는 처지가 되어 앉아서 속을 끓이자니 그것도

여우가 할 짓이 아니다 싶은 백송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미호가 삼십삼 년 삼월 삼일 낮을 살아내는 그때까지는 이를 앙다물고 버텨야만 한다.

내 그 봄날이 오기만 한다면 미호와 희수 그리고 동현을 데리고 바다를 보리라.'


안방에서 백송이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안의 짙푸른 바다를 떠올리는 동안 희수는 부엌에 있는 식탁에 저녁을 차렸다. 동현의 것까지 수저, 젓가락 세 벌이 놓여 있는 식탁에 서둘러 씻은 미호가 자리에 앉았고 희수도

뒤이어 앉았다. 배가 고픈 미호가 서둘러 수저를 들다가 수저도 들지 않고 가만히 있는 희수를 보고 멈칫했다.


"오빠는요?"

"아니다. 어서 먼저 먹어."


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거실 창밖으로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길게 내뿜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오빠는 오늘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려나보다.'






여섯 살 때부터 여덟 살이 된 동현과 함께 살게 된 미호가 어느 날 백송에게 물었다.


"할무니, 그런데 왜 사람들이 오빠는 예쁘다고 하는데 나는 착하다고 해?"

"나는 왜 예쁘다 안 하고 착하다고 해?"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미호를 자신의 눈동자에 둘러진 붉은 고리 안에 담아 바라보던 백송은

이걸 어찌 대답해야 하나 순간 난감했다.


'마음은 너처럼 귀하게 예쁜 사람을 찾기 힘들지.

그러나 모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걸 어찌하겠니.'


세상사람들의 기준이 미호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 걱정이 된 백송이 말했다.


"이 할미 눈엔 미호가 최고 예쁘지."

"정말... 그럼 오빠 보다도 내가 더 예뻐?"

"암만.. 말이라고..."


좋아서 할미의 목을 끌어안고 팔짝팔짝 제자리에서 뛰는 미호를 안고 있는 백송에게 아이는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애처로움이었다. 백두의 더러운 손이 닿으려는 순간 날벼락을 날려 당장의 급한 불을 껐지만 이제는 위험의 순간마다 이 아이를 어찌 지키나 싶어 그녀는 조바심이 났다. 어린이 집에서 돌아오자마자 할미에게 안겨드는 미호와는 다르게 동현은 백송을 멀리 했다. 제 아비 손으로 넘긴 동현의 손톱을 취한 백송이 본 동현의 하루는 곱상한 외모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어서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걸 알아내는 백송의 능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동현은 커갈수록 집을 나간 제 어미를 닮아갔다. 달이 차고 해가 지날수록 키가 훌쩍 크고 인물이 훤해지는 모습에 지나가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도 뒤를 돌아 다시 인물을 확인하곤 했다.

동현은 대학보다는 연예인이 되고 싶어 했다. 집안에 돈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훔쳐서 서울의 연예기획사로 올라갔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그였다. 희수는 그런 아들에게서 집을 나간 아내의 모습이 자꾸만 비쳐 보여서 불안했다. 머리 큰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말도 듣지 않고선 세월을 흘려보내는 아들이 안타까워서 희수는 걱정의 크기만큼이나 부쩍 늙어갔다.

입영통지서를 받고 연기 신청도 하지 못했는데 연락도 안되는 동현 때문에 마음을 끓이던 희수는 아들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겨우 설득해서 그를 군대에 보냈다. 그것이 그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그는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