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미호 씨.

14화. 미호.

by 묭롶

오후 세시 삼십 분 환자들의 바이탈 체크를 위해 병실을 돌던 미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봤다.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녹음이 짙은 플라타너스가 햇빛을 막아서기라도 하듯 무성한 잎사귀마다 치열한 녹색을 발하고 있었다. 더위와 매미의 합창이 콜라보를 이뤄 바깥은 분명 시끄러울 테지만 에어컨이 강(强)으로 틀어진 병실은 조용하고 서늘했다. 미호는 그 순간 문득 서글펐다.


'내 생은 단 한 번도 시끄러울 틈도 없이 이렇게 사그라드는 것일까.'


금방이라도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러질 것만 같은 할머니를 봐서는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미호는 요즘 들어 부쩍 우울했다. 할머니는 내년 봄이면 이제 다 함께 손 잡고 바다를 보러 갈 수 있을 거라고 조금만 참자고 얘길 하지만 정말로 그날이 오기는 하는 것인지, 그 말을 믿어야 하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을 말없이 붙잡고 그녀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동자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지만 정작 할머니는 그 무엇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서른두 해를 할머니와 함께 하면서 자신의 가정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은 짐작했지만 그 다름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렵게 할머니에게 물을 때면 그저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는 할머니였다.



"아가, 이 할미랑 약속하자."

"응.. 뭔데?"

"절대 이 세향리 밖으로 나가선 안된다. 알겠지?"

"왜?"

"그게 네게 주어진 업(業)이란다. "

"네가 이 할미의 곁에서 멀어질수록 위험이 널 쉽게 찾는단다."

"에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너뿐만 아니라 이 할미도 위험해진단다."



중학교 수학여행을 가겠다는 미호를 붙들고 할머니는 그녀에게 세향리 인근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자신뿐만 아니라 할머니도 위험해진다는 말에 미호는 선뜻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을 따르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 때문에 그녀는 수학여행도 졸업여행도 대학 MT도 가지 못했다. 겨우 세향리 인근

광역시에서 대학을 다닌 것이 전부였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친구를 갖지 못했다. 평범하지 못한 자신의 현재를 누군가에게 보여줘서 동질감을 획득할 자신감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 옆 자리에

앉은 짝꿍에게 자신의 집안 사정을 얘기했다가 상처를 받은 뒤로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머릿속은 시끄러웠지만 오늘도 병실에서 잠든 환자들의 손톱을 잘 갈무리해서 복주머니에 담은 미호는 바이탈 차트를 의료물품이 든 카트 위에 얹고서 간호사실로 돌아왔다.


"어머, 미호쌤, 우리 초 긍정께서 웬일로 이리 기운이 없으실까."


간호사실에서 약품 재고 검수를 하던 수간호사가 의료카트를 밀고 오는 미호를 보고 말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그러지 말고 내가 용한 점집을 아는데 거기나 같이 가는 건 어때?"

"뭔가 안 풀린다 싶을 때 가면 정말 용하다니까.... 그러지 말고.. 응?"

"혹시 알아? 난 로또 맞고 자긴 남친 생길지."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데 할머니가 제일 걱정하시던 점집이라니.....'

"할머니가 불교시라 점집 싫어하세요."

"으그.. 이 답답이.. 그 나이에 할머니 무서워 암것도 못하고."


혹여 그녀가 또 점집 얘기를 꺼낼까 봐 미호는 서둘러 환자 물품을 챙겨서 병실로 향했다. 퇴근 전까지 샤머니즘 신봉자인 수간호사쌤 눈을 피해 병실을 누비느라 미호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피곤했다. 그녀는 저녁 여섯 시가 되어 나이트 당번들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병원 로비를 나섰다. 로비의 자동문으로 나뉜 바깥은 아직도 환했다. 흡사 해가 지지 않을 것처럼 환한 햇살 아래 선 미호는 지금이 꼭 아침인 것만 같았다. 저 문을 통과해서 다시 출근을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밝음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그녀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뚱미호."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 미호의 눈에 병원 로비 앞에 자리 잡은 커다란 플라타너스 둥치에 기댄 동현이 보였다. 한 손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폴로셔츠에 흰 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썼지만 미호는 그가 동현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서울로 올라가 소식이 끊겼으니 십 이년 만의 만남이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그에게 다가가자 동현이 선글라스를 벗어 폴로셔츠 포켓에 접어 넣고 나무에 기댔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불어오는 바람에 스친 동현에게서 낯선 타지의 냄새가 묻어났다.

미호는 시골 아이들이 방학 때 시골에 잠깐 내려온 서울아이들을 보며 신기해하는 것처럼 동현이 부럽고 신기했다. 반가움 반 신기함이 반 섞인 들뜬 음성으로 미호가 말했다.


"오빠, 왜 이제 온 거야. 삼촌 좋아하시겠다."

"너 행여나 울 아빠한테 나 내려왔다는 말하지 마.

나 그럼 당장에 다시 올라갈 테니까."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바람처럼 그가 떠날까 봐 미호는 동현의 옷자락을 붙잡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아냐.. 나 절대 말 안 할게."


자신에게 너무 쉬었던 다른 여자들처럼 어쩌면 그중에서 가장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한 저 어린양을 어찌하면 좋을까 싶은 눈빛으로 동현이 미호를 잠시 바라봤다. 잠시 침을 삼킨 동현이 미호의 손에 명함을 한 장 쥐어줬다.


"연락해. 내 연락처야."

"오빠, 그럼 어디로 갈 건데?"

"그건 담에 얘기해 줄게. 난 이만 간다."


금방 뒤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가버린 동현의 뒤를 멍하니 한참 동안 바라보던 미호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손바닥에 쥐고 있던 명함을 보았다.


[BIG 엔터테인먼트 박동현 매니저

010-XXXX-XXX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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