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미호 씨.

15화. 미호의 첫사랑

by 묭롶

"이제 오니? 배고프겠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신을 반기는 희수를 보자 미호는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평소 말은 하지 않지만

그가 매일 아들을 기다린다는 걸 아는 미호로서는 오늘 퇴근길에 만난 동현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것이 희수에게 못내 미안했다.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해 어물쩍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다음 욕실에 들러 대충 씻고 할머니 방에 들러 손톱이 담긴 복주머니를 할머니 손에 쥐어주고 식탁에 앉았다.


"우리 미호도 좋은 사람 만나야 할 텐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을 크게 한 술 떠서 한 입 가득 떠 넣은 미호의 모습을 보며 희수는 그 모습에서

아들을 그려보는 것 같았다. 미호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그의 바람은 어쩌면 자신의 아들 동현이 이제 정착해서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그의 본심을 에둘러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성년이 된 이후로 희수의 월급과 집안의 생활비는 매월 넉넉히 지급하고 있지만 희수가 그녀를 돌봐준 시간이 돈 때문만은 아니란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장변호사도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왔지만 그녀에게 희수는 삼촌이자 아버지였다.

밥을 먹는 자신을 지켜보다 가만히 일어나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호는 다음날엔 동현에게 전화해서 어떻게든 집으로 데리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밥을 먹고 할머니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문을 바라보며 좌정해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너무나

자그마한 그녀의 뒷모습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아서 미호는 조용히 다가가 뒤에서 할머니를 가만히

안았다. 염불을 외고 있던 할머니가 눈을 뜨고 자신을 감싼 미호의 손을 잡았다.



"아가,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할머니도 참, 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그냥 별일 없이 시간이 빨리 가서 할머니랑 바다 보러 가고 싶어 그러지."

"그래. 그래. 아무렴..나무관세음보살."



미호의 바람이 이뤄지길 바라며 외는 할머니의 '관세음보살'에 담긴 간절함이 마음에 다가와 미호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매주 토요일마다 마을회관에서는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을 모시고 점심을 대접했다. 희수와 미호도 토요일 아침에 함께 집을 나서 봉사에 참여했다. 이날도 평소처럼 희수는 주방 쪽 일을 도우러 들어가고 그녀는 회관 뒷마당에서 점심거리 손질을 돕다가 회관에 어르신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회관 안쪽으로 들어가 눈이 어두운 어르신들의 손톱을 깎았다. 매주 해오던 일이라 어르신들은 미호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정신없이 점심 배식이 끝나고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끝내고 나니 시간이 오후 세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회관 앞에서 담배를 한 개비 태우던 희수에게 손톱이 든 복주머니를 맡긴 미호는 잠시 약속이 있다며 그를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다.


회관 옆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가 레모네이드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은 미호는 주머니에서 어제 동현이 준 명함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한참을 전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번호를 누르고도 또 한참을 한숨을 쉬며 망설이다 퉁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차례 정도 울렸을 때 안 받나 보다 싶은 안도감에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동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오빠, 나야."

"그니깐 동생이 한 둘이 아닌데 누구냐고?"

"나야. 미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 미호는 삼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했지만 그 순간이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다.


"아.. 뚱미호...오..."


동현이 집에 같이 살 때도 그는 살집이 통통한 미호를 매일 뚱미호라고 놀렸다. 아버지인 희수가 야단을 쳐도 소용이 없어서 동네에서도 뚱미호라고 부르는 통에 미호는 학교에서도 별명이 자연스럽게 뚱미호가 되었다.

미호는 학창 시절 놀림받던 그때가 떠올라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하지만 삼촌을 위해 참아야 했다.


"오빠, 지금 어디야?"

"넌 어딘데?"

"난 마을 회관 옆에 카페."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온다는 말 뒤로 곧바로 끊긴 전화기를 들고 달아오른 얼굴이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은 미호는 귓불까지 빨개져서는 물방울이 맺힌 차가운 레몬에이드 음료 잔을 뺨에 갖다 대었다.

동현은 통화가 끊기고 삼십 분 후에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페로 들어온 그는 자리에 앉아 있는 미호를 보자마자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켰다.


"가자."

"어. 어. 어.. 어딜?"


당황한 그녀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동현은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카페문을 열고는 카페 앞에 서 있던 택시 뒷좌석 문을 열고 그녀를 먼저 태운 다음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들을 태운 택시는 곧바로 출발했다. 미호는 난데없는 이 상황이 얼떨떨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동현은 택시 안에서 말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리는 택시의 차창 너머로 세량지의 수려한 경관이 비쳤다.

화창한 여름날의 풍경이 세량지를 채운 수면 위에 반사되고 있었다. 사진 좀 찍는 사람들이 문전이 닳도록

드나드는 세량지이지만 정작 인근에 살면서도 몇 번 와보지 못한 미호로서는 지금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차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미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동현은 마음이 복잡했다.

어제 병원에서 퇴근하는 미호를 만나기 전 그는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교복 입은 그녀의 모습이 기억의 전부였다. 통통한 반편이가 그가 아는 미호였다. 그가 패악질을 부렸던 아빠만큼이나 그가 함부로 해도 그에게 뭐라 하지 못하는 반편이가 바로 그녀였는데, 막상 십이 년이 지나 병원 현관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여전히 통통했지만 과거의 어린이는 아니었다.


"백두님은 도대체 왜.... 이런 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