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현과 함께 탄 택시가 멈춰 선 곳은 세량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별장이었다. 택시에서 먼저 내린 동현이 별장 정원에 놓인 테라스 벤치에 가서 앉았다. 뻘쭘하게 택시에서 내린 미호는 앉아 있는 그에게서 두어 발짝 떨어진 채 서 있었다. 6월 한 달의 장마 기간 동안 만수(滿水)에 이른 세량지에는 산그림자 위로 석양이 물들었다. 세량지를 가득 채운 석양은 미호가 바라보는 동현의 옆얼굴에도 가득 찼다. 담배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일 때 패인 그의 볼우물에 고이는 근심이 그녀의 눈에 비친 순간 미호는 눈물이 났다. 동현의 볼에 패인 볼우물 속에 평생을 아내를 그리고 아들을 기다리며 사는 희수 삼촌이 있었고 자신만을 걱정하며 기도로 하루를 보내는 할머니가 있었고 그리고 그런 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생(生)을 살아가야 하는 실존의 고통을 업(業)으로 짊어진 생명들이 애달파져서 미호는 그 순간 동현 또한
안쓰러웠다. 자그마한 할머니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위로했던 미호의 손이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던 동현의 손등 위에 겹쳐졌다.
"야? 너 우냐?"
동현의 목소리를 들은 미호는 순간 화들짝 놀라 그의 손등 위에 포개졌던 자신의 손을 황급히 거두어들여 등뒤로 감췄다. 뒤로 물러서는 미호의 눈동자에서 동현은 슬픔을 읽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표정은 방황하던 그에게 군대를 권했던 아빠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아빠 말 듣고 군대를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겠지.'
스물세 살의 나이로 만기 전역을 한 동현은 전역을 하자마자 연예기획사를 찾아다니며 프로필을 돌렸지만
모두 나이가 애매하다는 얘기만 할 뿐 어느 곳 하나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런 그를 받아준 곳이
칠(七) 장로가 대표로 있는 BIG엔터테인먼트였다. 마침 백두의 전담을 했던 기사가 행방불명된 직후였고
다들 그 업무를 꺼리는 상황에 곤란해진 칠장로는 동현을 로드매니저 겸 백두 전담으로 배치했다.
BIG엔터에 몸 담은 이후로 그는 연예인을 꿈꾸는 연예인 지망생이나 가수 연습생들과 함께 지냈다. 그에게 여자는 쉬운 상대였다. 동현의 겉모습에서 호감을 느끼는 여자들은 그에게 돈과 숙소를 제공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공하는 물질에 상응하는 가치를 동현이 자신에게 되돌려주기를 바랐다. 여자들의 욕망과 동현의 필요가 만나 이뤄진 관계는 번번이 서로에 대한 환멸과 증오로 끝이 났다. 그러한 관계에 지긋지긋해진 동현은 비트코인으로 인생 한 방을 꿈꾸며 양다리를 걸쳤던 여자 두 명에게서 제법 많은 돈을 꼬여냈지만 여자 둘 모두에게서 혼인빙자 사기로 고소당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투자한 비트코인은 휴지조각이 되어 그는 여자들로부터 내용증명이 발송된 BIG엔터에서도 쫓겨날 상황에 처했다. 그런 그를 구해준 것이 바로 백두였다.
대표로부터 호출을 받고 대표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칠장로 즉 BIG엔터의 대표 옆 자리에는 백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인사기록 파일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대체 이런 걸 사무실로 오게 만들면 어떡해?
너 연습생들 상대로 이런 짓이나 벌이고... 말도 필요 없어. 그냥 빵에 가."
손에 들고 있던 내용증명 우편물을 책상에 내던진 대표가 문을 박차고 나간 뒤 사무실 의자에 앉아 망연자실한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동현의 귀에 백두의 음성이 들렸다.
"어머. 재 화내니까 무섭네.
같은 식구끼리 뭘 저렇게까지....."
호호호. 그동안 날 도와준 것도 있고..
이번에 동현 씨가 날 도와줄 일이 하나 있는데...."
"백두님....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그리고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과거 칠장로가 백두의 자금력이라는 동아줄을 잡았던 그때처럼 동현은 백두가 던진 동아줄을 냉큼 움켜쥐었다. 백두가 둘러쓴 면사 너머로 그녀의 이글이글한 시선이 느껴져서 동현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려운 건 아니야. 어릴 때 같이 살던 여자애 있지? 그앨 데려와."
"그렇게만 해줄 수 있다면 이 문제는 우리 법무팀에서 바로 해결할 거야."
"물론 잘만 해낸다면 내가 조연 자리도 하나 잡아줄게."
여자를 꼬여내는 건 동현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냥 그동안 해왔던 대로만 한다면 그 누구든 자신의 말대로 꼬여낼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미호의 눈동자에 담긴 슬픔을 읽은 순간 동현은 몸에 힘이 빠졌다. 미호에게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는 힘들겠구나. 나도 어느 정도 마음을 내어줄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쉽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동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여자들의 시선에서 비릿한 욕망을 읽어왔고 그 끈적한 욕망이라는 언덕에 등을 기대 살아왔던 동현은 미호를 보며 마음을 내려놓은 순간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아빠와 함께 사는 동안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잘생겼지만 냉소로 가득한 동현의 얼굴이 한순간 밝아졌다.
불이 꺼진 집에 등불 하나가 껴진 것처럼 동현의 얼굴에 밝은 빛이 잠깐 켜진 그 순간 미호의 마음속에서도
등불 하나가 켜졌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놀려왔고 커서는 자신을 괴롭히기만 하고 삼촌을 맘 아프게 하는 나쁜 오빠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마음이 아픈 한 남자가 있었다. 마음에 등불이 켜지기 전까지 보지 못했던 그 모습이 미호의 가슴에 박혔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동현의 외모를 보며 감탄할 때 그 모두가 보지 못했던 그의 진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