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백두의 계략.
"잠깐, 미호쌤, 나 좀 봐."
병실을 정돈하고 나오는 미호를 본 수간호사가 미호를 불러 세웠다.
"뭐 좋은 일 있는 거지? 응? 남친 생긴 거야? 응?"
물음표로 가득 찬 수간호사의 호기심 가득한 눈을 피해 미호는 병실 물품이 담긴 카트를 밀고 병실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 나와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티가 나나.'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미호는 자신을 유심히 살폈다.
가뜩이나 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가면 희수 삼촌이 얼굴을 대놓고 쳐다보며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지만 미호는 차마 지금 만나는 사람이 삼촌의 아들 동현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동현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동현을 만난다고 자신을 합리화했지만 이제 희수 삼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겨버린 미호는 그를 볼 때마다 죄책감 때문에 불편해졌다. 또 그런 미호의 달라진 행동에 삼촌은 서운한 눈치여서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도 그저 그녀의 손만 꼭 쥐고 눈을 들여다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10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삼촌 생각에 심란해졌던 그녀는 엘리베이터 도착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다시 금세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버튼을 눌러 도착층에 불이 들어오고 도착층에 이르러 문이 열린 것처럼 미호의 맘 속에는 사랑이라는 버튼이 눌러졌고 그녀는 그 도착지가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낯선 모험에 나선 아이처럼 신이 나고 행복했다.
세량지가 내려다보이는 별장 테라스에 놓인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동현은 저 멀리 아래쪽에서 걸어 올라오는 미호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두어 발짝 걷다 멈칫하고 멈춰 섰다.
"실수하면 안 돼, 이번 주말 일요일 오후 다섯 시야.
일이 마무리된 후 합의서는 최종 서명할 거니 그리 알고."
"...... 백두님, 그럼 저는 그 뒤에 어떻게 할까요?"
"넌 스탠바이만 하고 잠든 거 확인하면 바로 BIG엔터로 가.
나도 곧 올라갈 테니까."
일요일 점심 봉사를 마치고 별장을 찾은 미호가 걸어 올라오다가 동현을 발견하고는 활짝 핀 꽃처럼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뛰어올라와 그의 손을 잡은 미호의 가쁜 숨만큼이나 얼굴이 발그레했다.
"걸어오지. 뭘 또 뛰어오기까지......"
미호가 잡은 손을 조심스럽게 빼낸 동현은 그녀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들어가자. 내가 너 좋아하는 아이스티 타 놨어."
졸피뎀이 든 아이스티를 달갑게 들이마신 미호는 금세 잠들었다. 잠든 미호를 침대에 눕힌 후 동현은 미리 준비해 놓은 캐리어를 끌고 문을 열고 나가며 백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십 오 년 전 칠장로와 함께 세향리를 찾았다가 칠장로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기억 때문에 백두는 이번엔 혼자 움직였다. 이 일과 관련해서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약속된 시간 전에 미리 내려와서 별장 아래쪽에 차량을 주차한 뒤 별장을 빠져나온 동현이 콜택시를 타고 사라진 한참 후에야 차에서 내려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온몸을 친친 감고 다니지 않아도 되겠군.
내 예전 모습을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지금보단 나으니까.
어찌 됐든 이제 여우구슬도 무수명(無壽命)도 다 내 것이야.
백송 그 늙은이의 결계 밖이니 지깟게 뭘 할 수 있겠어.
그 늙은 것이 가장 아끼는 것을 내가 가지면 그게 가장 큰 복수지.'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무려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연장에서 숨죽이며 사람들의 기(氣)를 빨아 온 그 길었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시간도 오늘로써 끝이 난다고 생각하니 백두는 짜릿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길었던 기다림의 시간만큼이나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여력이 없는 백두가 별장의 문을 열었다.
미호는 별장 안 침실에 누워 있었다. 테라스로 이어진 침실의 통유리 창 밖으로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닥쳐올 일을 알지 못한 채 잠이 든 미호의 평온한 표정을 본 백두는 세상 태평한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뜬 백두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활활 일기 시작할 때 백두는 주문을 외워
자신의 영혼을 몸과 분리한 뒤 미호의 몸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그 순간 세향리 집 안에 좌정하고 있던 백송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드디어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