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미호 씨.

18화. 또다시 봄이 오면.

by 묭롶

"뭐야? 왜 이러지?"


미호의 몸으로 들어가려던 백두의 영혼이 계속 몸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다시 수십 번 들어가기 위한 시도를 한 뒤에 백두는 일단 자신의 몸으로 다시 들어갔다.


"뭐가 문제지? 여우구슬 때문인가.

저게 있어서 내가 못 들어가나.

그럼 여우구슬을 먼저 빼내서 몸에 취한 뒤 들어가야겠군."


유사 이래로 그 누구도 무수명(無壽命)을 차지한 선례가 없었기에 백두는 이런 시행착오를 겪는다고 생각했다. 여우구슬이 몸을 차지하고 있어서 자신이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미호의 몸에서 여우구슬을 꺼내 자신의 몸에 갈무리 한 뒤 곧바로 미호의 몸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그녀가 자신의 계획대로 구슬을 꺼내 몸에 담은 후 영혼이 빠져나가려던 그 순간 그녀의 귀에 한 글자의 노호성(怒號聲)이 들려왔다.



'멸(滅)'



귀로 한 글자의 전음이 들림과 동시에 백두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여우구슬에서 초신성의 폭발과 같은 벼락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몸 안에서 시작된 벼락 줄기는 그녀를 순식간에 가루로 바짝 말려 부숴버렸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그 찰나의 순간 백두의 머릿속에는 단 두 글자만 떠올랐다.



'왜지?'


소멸되는 백두의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백송이 남긴 의식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네가 미호를 찾은 게 아니라 내가 널 기다린 것이다.

내 극락왕생을 버리고 마지막 살생을 행해서라도 널 내 아이 곁에서 치울 것이다.'



백두를 거둘 주문을 외운 순간 고목이 된 백송령은 불길에 휩싸였다. 백송의 두 눈동자 속 불타는 붉은 고리에서 시작된 불길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아 소멸이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백송은 웃었다. 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크게 웃어보지 못했던 그녀가 큰 소리로 웃었다.



'백두, 네가 보낸 동현이 이리 큰 일을 해낼 줄이야.'







병원에서 퇴근하거나 일요일 점심 봉사 이후에도 항상 집에만 있던 미호가 갑자기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지자 백송은 어느 날 집으로 들어온 미호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미호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바라본 백송이 말했다.


"아가. 요즘 만나는 사람 있니?"


말을 못 하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미호에게 백송은 만나는 사람 모르게 그의 손톱을 조금만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손톱으로 무얼 하는 줄은 몰랐던 미호는 동현이 잠든 틈을 타 그의 손톱을 살짝 깎아서 그걸 할머니에게 전했다.

그녀가 전해 준 손톱을 통해 만나는 사람이 동현임을 확인하고 얼마 되지 않아 미호의 몸 안에 있는 여우구슬이 울었다. 구슬이 전하는 신호를 따라 미호의 몸을 살피던 백송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미호의 몸속에서 자라기 시작한 새 생명을 감지한 백송은 그 순간 여우구슬에 담겨 있던 미호 엄마가 남긴 집명술 부적을 구슬에서 빼내어 미호의 심장에 붙였다.


백송은 알고 있지만 백두는 알지 못하는 사실 덕분에 백송은 앉은자리에서 미호를 통해 동현을 감시해 가며 백두가 세운 계획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백두는 아이가 생긴 걸 모른다.

미호의 몸에 아이가 있는 이상 그것은 절대 그 몸을 차지할 수 없다.

백두가 혼란에 빠져 여우구슬을 먼저 취하려 할 때 그것을 멸할 것이다.'






백두와 백송이 동시에 소멸되는 동안에도 깊이 잠들어 있던 미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백송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 이제 이 할미는 극락왕생을 하게 되었구나.

비록 너랑 바다를 가지 못하지만 이 할미가 좋은 곳에 가게 됐으니 아가 이제 너도 걱정하지 말고

네 삶을 살거라.'


말을 마친 할머니는 빛이 되어 하늘도 날아올랐다. 좋은 곳으로 간다지만 자신을 떠나는 할머니가 슬퍼서 미호는 꿈에서 울다가 잠이 깨었다. 불이 꺼진 어두운 별장 안에서 홀로 일어나 얼떨떨한 미호는 주변을 둘러보며 동현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이듬해 봄 드디어 무수명(無壽命)의 백지수표가 해제되는 33년 3월 3일 정오가 지나는 줄도 모르는 미호는 불에 타서 없어진 백송령이 있던 자리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봄 햇살을 맞으며 졸고 있었다. 햇살은 제법 부풀어 오른 그녀의 배 위로도 내리쬐었다. 그렇게 잠든 그녀의 심장 위에 붙어 있던 집명술 부적이 한 낮이 지나 빛을 발했다. 수명이 없던 미호의 백지수표 수명 위로 그녀의 엄마 세화가 남겨 둔 수명이 기록되었다.

나른한 낮잠에서 깨어난 미호는 그전과 다를 게 없었지만 이제 그녀는 여우구슬 없이도 그리고 배 속의 아이와 분리된 그녀 만의 목숨을 갖게 되었다.





다시 일 년이 지나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미호가 백송령 정자 앞을 걷고 있을 때 외지인이 타고 온 차량에서

사냥개가 튀어나왔다. 사냥개는 자신의 키보다 낮은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미호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유모차를 몸으로 감싼 그 순간 그 안에 있던 아이의 두 눈동자 안에서 붉은 고리가 빛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달려들던 사냥개가 정지동작처럼 멈췄다. 흡사 벼락이라도 맞아 감전된 것처럼 꼼짝도 못 하던 개는 잠시 후 혼비백산해서 줄행랑을 쳤다. 아이가 그 모습을 보며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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