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미호 씨.

13화. 동현.

by 묭롶

"동현아, 인사드려 이제부터 함께 살 할머니야."


자신의 등 뒤로 숨는 아들 동현의 손을 잡고 몸 앞으로 아이를 이끌었지만 아들은 싫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뒤로 숨으려고만 했다. 그런 동현을 보고 미호가 동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빠, 우리 친하게 지내자."


손을 내민 미호를 본 동현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그대로 손을 내밀어 미호를 냅다 밀어버렸다. 갑자기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은 미호가 울음을 터뜨린 순간 동현은 보았다.

미호의 옆에 서 있는 할머니 백송의 눈동자에서 붉은 고리가 활활 불타는 것을.......

자신의 손녀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모든 것들을 태워 없애버릴 듯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 붉은 불의 고리가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달려들까 봐 동현은 냅다 달아났다.





"이봐... 지금. 자는 거야?"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백두의 목소리에 꿈속에서 백송을 피해 달아나던 동현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었다.

공연장으로 진입하는 구간에 정체가 심한 탓에 깜박 잠이 들었나 싶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 동현이 뒤로 고개를 돌려 백두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곧 공연장으로 모시겠습니다."


VIP전용 공간에 주차를 한 후 동현은 서둘러 뒷 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리무진의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백두가 몸을 일으켜 차에서 내렸다. 백두는 온몸을 감싸는 하얀 드레스에 차양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BIG 엔터테인먼트에는 암묵적으로 전해지는 금기가 있었다. 바로 가려진 백두의 모습을 본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소문인지 사실인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오 년 전 가수 B 양의 로드 매니저였던 김실장이 공연장에 백두를 의전하러 갔다가 야외 공연에서 강한 바람에 잠깐 동안 백두의 차양이 바람에 날린 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뒤로 BIG엔터 어디에서도 그를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동현은 그 소문의 진위 여부를 떠나 백두만 보면 소름이 돋아서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자고로 꼭 공포영화에서도 열지 말라는 문을 연 자 먼저 죽을 것이며 하지 말라는 것 하는 자 또한 먼저 죽을 것이니 쓸데없는 호기심이 명을 단축하는 지름길임을 동현은 잘 알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백두는 공연장 최 상층부에 마련된 부스로 들어갔다. 부스 안에는 얼음에 담긴 최상급의 샴페인이 담겨 있었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 펑 소리가 나게 샴페인을 딴 백두는 크리스털 샴페인 잔에 삼분의 이

가량을 따랐다. 손에 든 샴페인 잔 아래에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삼분의 이 가량이 붙어있는 입술 오른쪽에 겨우 뚫린 공간으로 샴페인을 흘려 넣던 백두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샴페인잔을 던져서 깨버렸다.


'내 입술을 이만큼 뚫는데 장장 십오 년이 걸렸다.

내 들러붙은 손가락, 발가락을 뜯는데 자그마치 칠 년, 내 발로 걷는데 무려 십 년이 걸렸다.

백송... 내 기어이 널 죽이고 말 것이다. '


앉아서 부들부들 떨던 백두의 몸에 올림픽 주 경기장을 가득 채운 인파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에 백두는 마음을 애써 추슬러 가라앉히고 안락의자에 깊게 몸을 눕힌 뒤 응집된 사람들의 기운을 조심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십오 년 전 백두를 따라 세향리에 내려갈 때만 해도 칠(七) 장로는 너무나 설레었다. 언강생심 꿈에서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분을 모시고 동행을 하다니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표시인 것만 같아서 칠(七) 장로는 눈뜨고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수리파 장로들 모임에서도 백두의 손길, 눈짓 한 번에 장로들은 애간장이 녹아 났다.

그 은혜로운 손길이 스치기라도 하면 곧 숨이 끊어질듯한 황홀함이 몰려왔고 장로들은 어떻게든 백두의 눈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사할 태세였다. 칠(七) 장로는 여우구슬의 행방을 알아낸 자신이 너무나 기특했고 자신에게 다가온 이 행운이 믿기지 않았다. 이 일이 잘되기만 한다면 자신은 큰 상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백송령을 지나 홀린 듯이 위로 걸어가던 백두가 대문에서 나온 남자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간 후

밖으로 다시 빠져나온 것은 백두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는 분명 백두였으나 그 형태는 그녀라고 믿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간 백두에게 당해 온 가스라이팅 때문인지 그 상황에서도 칠장로는 그

시커먼 숯덩어리를 끌어안고 뒷좌석에 태웠다. 그리고 미친 듯이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뚫고 달리기 시작한 차량이 천안에 다다를 즈음 칠장로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저 숯덩이의 말을 따라야 하지?'

'이제 저 모습은 더 이상 백두가 아닌데...'


룸미러 뒤로 비치는 백두의 모습은 끔찍했다. 저 끔찍한 것을 향해 품었던 자신의 연정과 희망을 되돌이켜본 그는 순간 미칠듯한 분노에 휩싸였다. 강한 사랑과 강한 증오는 종이 한 장의 차이여서 그는 당장 차 문을 열고 저 흉측한 것을 도로에 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급브레이크를 밟은 그는 가드레일 옆에 차를 세우고 뒷 좌석 문을 벌컥 열어 숯덩이가 백두를 끄집어냈다. 옷과 함께 들러붙어버린 백두의 멱살쯤 되는

부위를 움켜잡은 칠장로가 그대로 가드레일 아래 절벽으로 백두를 집어던지려는 순간 입술이 들러붙어 말도 못 하는 백두가 그의 귀에 전음을 전했다.


"내가 잃은 건 외모지만 난 아직 돈이 너무 많아."


그 순간 칠(七) 장로는 멈칫했다.

사 십년지기였던 친구를 믿고 동업으로 자신의 회사보다 큰 YM엔터를 인수했는데 이미 YM엔터와 짜고 자신에게 접근한 친구가 사실은 자신의 BIG엔터를 역으로 흡수합병하기 위한 작전세력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칠장로는 지금 영혼이라도 팔아야 할 상황이었다. 이미 사채시장까지 손을 쓴 YM엔터 때문에 그는 돈줄이 막혀 있었다. 그런 그에게 백두는 마지막 순간에 동아줄을 던졌다. 바로 그녀 자신과 칠장로에게....


"그래야지. 일단, 나를 다시 차에 태워. 나머진 올라가면서 얘기하지."


혼자 힘으로 BIG엔터를 일군 칠장로는 역시 상황에 따른 태세전환이 빨랐다.

뒷좌석에 다시 앉게 된 백두는 칠장로에게 말했다.


"거래는 간단해. 넌 그냥 공연장에 날 위한 자리 하나만 만들어."


서울로 올라간 백두는 자신의 법무법인을 통해 정식으로 BIG엔터테인먼트의 등기이사가 되었다. 동시에 주식시장에 합병 무산으로 인한 YM엔터와 BIG엔터의 주식이 휴지조각이 될 거라는 찌라시를 날림으로써 주식을 헐값에 던진 개미들과 소액주주들의 주식을 긁어모아 BIG엔터의 실질적인 최대주주가 된 후 주주총회를

통해 칠장로를 물 먹이려던 친구와 YM엔터의 작전세력을 한 방에 퇴출시켰다.

그전까지 백두의 황홀한 외모에 무릎 꿇었던 칠장로는 이제 그녀가 가진 능력과 힘 그리고 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찌 됐든 그녀는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구세주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언제든 자신을 없애버릴 수 있는 인물이라는 살벌한 경각심이 칠장로를 각성시켰다. 이후 칠장로는

백두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꺼렸다. 그런 그에게 BIG 엔터에서 어떤 자리라도 좋으니 자신을 써달라고 동현이 찾아왔다. 칠장로는 그를 곧바로 백두 전담으로 배치했다.


동현의 이력서를 백두에게 전한 순간 그녀의 가려진 차양 너머로 눈이 빛을 발했다.


"이 아이, 주소가 세향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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