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여줄 남자.
11화. 그와 그녀의 새로운 출발.
"안녕!"
1층 원무과에 들러 퇴원수속을 하고 왔는지 한 손에 수납확인서를 쥔 채 병실문을 들어선 미리내가 병세를
향해 다른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병실 창문으로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햇살보다 밝은 그녀의 모습이 눈부셔서 병세는 주먹 쥔 손으로 눈을 문지른 후 다시 떴다.
이른 새벽 눈을 뜬 그는 18층 입원환자용 샤워장에서 씻고 입원할 때 입었던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상을 정리했다. 그 뒤엔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창밖으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았다.
태양은 오늘도 어김없이 떠올랐지만 자신의 생은 한낮의 태양처럼 정점을 찍지도 못한 채 가라앉는 것만 같아서 그는 마음이 착잡했다.
'어떡해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해 봤지만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도 다시 살아갈 용기도 없었다. 당장 수천만 원은 족히 나왔을 병원비만 생각해도 그는 다시 죽고픈 생각뿐이었다. 그는 답도 대책도 없는 자신의 인생에 빛처럼
나타난 그녀를 다시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그래. 정리도 다 된 것 같고 가자. 밥 먹으러."
미리내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의 팔목을 붙들어 끌고 병실문을 나섰다.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병세는 그저 그녀를 따라 걸을 뿐이었다. 그녀를 정신없이 뒤따르다 도착한 곳은 청진동의 해장국집이었다. 모자를 눌러쓴 미리내가 의자에 앉아 익숙하게 주문을 했다.
"여기 콩나물 하나, 선지 하나, 소주 하나."
주문을 마친 미리내가 자신의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병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내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병을 따서 술잔에 따른 후 앞접시에 콩나물국밥의 국물을 떠서 흰밥을 말아 병세 앞에 놓아주었다.
"아직은 음식 조심해야 하니까 밥알 퍼지면 먹어."
그의 손에 수저를 쥐어준 그녀는 이내 소주를 한잔 입에 털어 넣고는 수저로 선지를 잘라 국물과 함께 입안에 밀어 넣었다.
"캬....... 있잖아. 내가 절에 있을 때 말이지 맨날 풀따구만 먹었는데
이런 세상이 있는 줄 어찌 알았겠어.
참 좋은 세상이야."
절이라는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병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응? 이제야 제대로 보네. 그래.. 그렇게 사람은 똑바로 봐야지."
눈을 맞춰 자신을 보는 병세가 대견한 듯 미리내가 환하게 웃으며 눈을 빛냈다. 그녀의 미소에 용기를 낸
병세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왜 살려주신 거예요?"
그의 질문에 미리내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너.. 복수하고 싶지?"
그녀의 말에 그동안의 세월이 북받쳐서 병세는 얼굴이 붉어졌다. 죽어서 귀신이 되서라도 갚고 싶었던 뼈아픈 원한이 떠올라서 그는 절로 손이 떨렸다. 하지만 돌아갈 곳 없이 비참한 자신의 처지로 어찌 복수를 꿈꿀 수 있단 말인가. 당장 이 식당문을 나선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랑 거래하자.
이 누나가 도와줄 테니 너도 한 가지만 날 도와주면 돼.
그럼 삼천 팔백만 원의 병원비도 퉁쳐줄게."
'아..... 병원비가 그렇게나 많이 나왔구나....'
주기적으로 신장투석을 해야 하는 엄마의 병원비만으로도 감당이 안되는데 이제 빚이 된 자신의 병원비를
생각하자 병세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그래도 지금 눈앞에 있는 동아줄이라도 잡지 않는다면 정말 일말의
희망도 없을 것 같아서 그는 그녀의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단 밥부터 먹어. 네가 뭘 할지는 내가 천천히 얘기할게
그리고 내가 검색을 좀 해봤는데 복수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수저로 부순 선지덩어리를 국물과 함께 먹으며 반주로 소주를 곁들일 때마다 연신 감탄하는 그녀를 보며 병세는 죽을 결심도 했었는데 이제 이판사판이다 싶은 심정으로 말아놓은 콩나물국밥을 수저로 떠서 먹었다.
식도를 따뜻하게 데우며 위장에 국밥이 도달한 순간 병세는 왠지 힘이 나는 것만 같았다. 사는 동안 딩동댕만 울렸을 것 같은 여자가 앞에 있어서인지 매번 땡만 울리던 자신의 인생에도 그녀가 전국노래자랑의 합격 실로폰 소리처럼 딩동댕을 쳐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는 그녀를 믿고 싶어졌다.
열심히 수저질을 하는 그를 지켜보는 미리내의 마음속에도 한가닥의 희망이 싹을 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