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여줄 남자.
12화. 그녀와 그의 거래.
미리내와 병세가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나온 시간은 오전 열한 시였다. 회사에서 집으로 그리고 다시 회사로 쳇바퀴 돌듯 살아왔던 병세는 모두가 회사에 있는 시간에 거리를 걷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그 기분은 학교를 땡땡이치고 놀이공원에서 타는 바이킹처럼 가슴이 조마조마 하면서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해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동안 고개를 숙이고 걷느라 바라보지 못했던 것들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화단에 피어난 작은 꽃들 그리고 앞서 걷는 미리내의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까지......
그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를 따라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북촌 한옥마을이었다. 그녀는 한옥마을의 오르막 끝 골목길을 돌아 오른쪽에 있는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대문에 도어록 비번을 입력한 후 마당을 거쳐 현관 비번을 누른 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녀 뒤에서 병세는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뻘쭘하게 그대로 마당에
서 있었다.
"야.. 뭐 해.. 빨리 들어와. 파리 들어온다."
안에서 소리를 지르는 미리내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란 병세가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은 뒤 거실에
발을 들여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파리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날고 있었다. 공중에서 벌처럼 붕붕 소리를
내며 날고 있는 파리들을 목격한 병세는 기겁해서 순간 움츠린 채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그의 발밑으로 무언가의 부스러기를 저마다 이고 지고 줄지어 이동하는 개미군단이 목격되었다. 깜짝 놀란 그는 펄쩍
뛰어올라 소파 위로 몸을 날렸다.
그렇다. 미리내는 고즈넉하고 정갈했던 북촌의 한옥 한 채를 석 달만에 지리산 산채로 만들어놓았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독립군으로 길러진 미리내는 그야말로 무술연마와 학습 외에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자명스님은 영특한 그녀를 어여삐 여겨 그녀의 행동에 무엇하나 제재를 가한 적이 없었고 조실부모한 그녀를 가엽게 여긴 공양주 보살들이 어려서부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뜰히 보살핀 결과 그녀는 가사에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사정을 간파한 삼신이 그런 이유로 그녀에게 처음으로 알려준 것이
바로 배달어플이었다. 사람과의 접촉을 피해야 하는 그녀가 굶을 수는 없었기에 삼신은 고심 끝에 그녀에게 음식을 시켜 먹는 법을 가르친 것이었다.
소파 위로 몸을 피신한 병세는 눈을 들어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상황은 눈을 감느니만 못하였다.
시켜 먹은 음식물 용기가 여기저기 수북이 쌓인 거실 창가에는 들이치는 햇살을 찬란한 녹색빛으로 반사하는 눈부신 소주병의 군단이 존재했다.
그 대혼란의 도가니 속에서도 미리내는 태연히 병세가 앉아있는 소파의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널려 있던 옷가지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테이블 위에 앉아 병세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병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고개 들어봐."
그녀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든 병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안절부절했다.
"눈 뜨고 사람 보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아직도 갈길이 멀어 보이는 병세의 모습에 미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암튼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거래는 성립된 거다."
본인 마음대로 말하고 결론짓는 미리내의 말에 병세는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제 상황이 선택권이 없는 것 같네요."
자신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병세를 바라본 미리내가 앉아있던 테이블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 순간 병세는 움찔하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두 팔로 자신을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흐미. 가스라이팅이 무섭다더니 널 보니 그게 일본군보다 무서운 게 맞구나.
일단 내 부탁을 들어주려면 네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겠다.
그러려면 먼저 네 문제부터 해결해야겠지?"
자신에게서 떨어져 주방으로 걸어가 생수 두 병을 들고 온 미리내가 생수병을 따서 그에게 건네자 팔로 옭매었던 몸을 풀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병세가 손으로 생수를 받아 들었다.
"마셔! 난 예전에 스승님이 계셨어.
모르는 건 뭐든 그분께 여쭤봤지.
그래서 난 걱정이 없었어. 난 대의를 위해 살았고 대의를 위해 싸웠고 대의를 위해 죽었으니까...."
그녀가 건네준 생수를 마시다 '죽었단'말에 기겁해서 먹던 물을 확 뿜어내고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병세를 본 그녀가 순간 당황해서 손을 마구 저으며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 아냐. 죽었다는 게 아니라 죽도록 열심히 했다고....
암튼. 지금은 스승님도 안 계시고 별 수 없이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내가 너라면 난 지금 복수가 하고 싶을 것 같아.
넌 어때?"
그녀가 '복수'라는 단어를 언급한 순간 병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순간 그가 생수병을 주먹으로 와락 움켜쥔 탓에 공중으로 물이 왈칵 뿜어져 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하고 싶어요. 복수!"
"그래, 좋아. 내가 도와줄게. 넌 나중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돼.
그럼 다시 얘기할게. 너와 나의 거래는 성사된 거다."
-"네."
병세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