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서 애벌로 삶은 돼지 등뼈를 찬물로 헹구던 민정은 급히 주방 수전을 잠근 후 키친타월에 대충 손을 닦고는 안방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바닥이 온통 물로 흥건한 가운데 화가 잔뜩 난 서준이 그녀를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막힌 세면대를 가리켰다.
"내가 캡을 눌렀는데 이게 절대 안 빠져."
민정은 그의 말에 세면대 바닥에 깊이 박힌 캡을 보고는 곁에 서 있는 남편 서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면대 주변과 화장실 바닥에는 그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흔적들로 너저분했고 그 모습에 그녀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공구상자가 있는 창고로 향했다. 공구함을 들고 화장실로 다시 온 그녀가 공구들 중 뾰족한 송곳을 찾아들고는 박힌 캡의 한쪽 면에 꽂고는 망치로 송곳머리를 살살 내리쳤다. 타격점에 가해진 힘에 캡에는
조금의 각도가 생겼고 그 사이로 공기가 들어가면서 박혔던 캡이 위로 올라왔다.
박힌 캡이 올라오면서 세면대의 물이 쏴아악 소리를 내며 밑으로 쓸려내려 간 순간 서준이 감탄의 박수를
쳤다. 그런 그를 뒤로 하고 공구함을 든 민정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오자 식탁에 앉아 컴퓨터 게임을 하던
열 살 된 딸아이 별아가 그녀를 쳐다보며 한마디를 했다.
"엄마. 엄마가 두 살 많다면서 아빠는 왜 맨날 엄마 이름 불러?"
다시 주방 수전을 틀어 남은 돼지 등뼈를 헹구던 그녀가 답했다.
"조용히 해. 늬 아빠 들으면 또 삐진다."
-"엄마엄마. 다른 집은 저런 건 다 아빠가 하는데 우리 집은 왜 엄마가 해?"
"아이고... 이러다 정말 듣겠다.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야."
-"엄마엄마. 엄마는 왜 저런 삐돌이랑 결혼했어?"
"그거야, 다 우리 별님이 낳으려고 그런 거지."
그녀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딸아이 별아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런 딸아이를 보며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왜 저렇게 특이한 AB형이랑 결혼했을까?'
모두에게 가혹했던 97년 IMF의 구제금융 사태가 해제된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경제는 한동안 힘을 쓰지 못했다. 민정이 다니는 아이피생명의 콜센터도 직원의 삼십 퍼센트를 감원해야 했고 남은 인원들도 회사의 유동성 자금 확보를 위해 보험 해약률을 어떻게든 감소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낮은 월급에 비해 높은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로 인해 이직률 또한 높았던 콜센터에서 중간 관리자인 팀장을 맡은 그녀는 위에서 쪼이고 아래에서 치였다.
그날은 그만둔 직원들을 대신해 새로 입사한 직원들이 그녀의 팀으로 출근을 하는 날이어서 아침 일찍 출근한 그녀는 신입 직원들이 앉을 책상의 아랫부분에 위치한 셋톱박스를 일일이 다시 세팅하는 중이었다.
책상 안으로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해서 작업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팀원이 그녀에게 다가와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아이고, 팀장님 이런 건 관리팀을 부르셔야죠."
팀원의 말에 엎드려 작업하다 무심결에 고개를 든 그녀가 책상에 머리를 쿵하고 찧었다.
"아얏.. 괜찮아요."
머리를 손으로 문지른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옆자리로 옮겨가서 다시 책상 아래에 있는 셋톱박스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고객상담팀의 자동문을 통과해 들어온 서준이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상을 발견하고는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가 책상 아래 엎드린 팀장을 발견했다.
"청소 아주머니시죠. 책상 아래까지는 안 닦으셔도 되는데요."
그의 말을 듣고 출근해서 업무준비를 하던 팀원들은 기겁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는 그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졸지에 청소아주머니로 오해를 받은 민정이 책상 아래에서 급히 빠져나오려다 또 책상에 쿵하고 머리를 찧고 말았다. 머리를 문지르며 그녀가 일어설 때 팀원인 수정이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이분은 청소아주머니가 아니라 우리 팀 팀장님이세요."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진 민정을 바라본 서준은 힐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수정에게 말했다.
"엎드린 등짝이 넓어서 아주머닌 줄 알았어요."
순간 상담팀 안의 직원들은 웃지도 못하고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모른 채 안절부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