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동안 전쟁의 참상을 다룬 몇몇 작품들을 읽어왔다. 하지만 문자로 표현된 전쟁 앞에서 나는 언제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관찰자였다.
그런 내가 커트 보니것의 [제5 도살장]을 읽었을 때 나는 전쟁의 한복판에 발목까지 잠긴 나를 발견했다. 이러한 경험은 알베르 카뮈의 [전락]에서 글을 읽는 독자인 내가 어느 순간 작중인물과 같은 자리(피고)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경험이었다. 커트 보니것의 문장이 갖는 강한 공감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커트 보니것의 작품을 읽어나가며 나는 그의 글솜씨라면 문학의 어느 장르를 택한다 해도 그가 표현하려는 바를 오롯이 글로 길어 올릴 수 있었을 텐데 왜 에세이나 기사가 아닌 소설이라는 형식(『제5도살장』, 『마더 나이트』)을 빌어 표현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바로 책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 정오에 아르놀트 마르크스와 교대하는 간수는 내 나이 또래의
마흔여덟 살 남자다. 그는 전쟁을 제대로 기억하지만,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하진 않는다.」 p29
작중인물 안도르 구트만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은 커트 보니것에게 제대로 기억하지만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전쟁의 참상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작가들이 너나없이 전쟁 관련
기록물을 내놓을 때 그는 차마 그들의 흐름에 동참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참전 동료인 버나드 V. 오헤어의 부인 메리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이후에 드레스덴의 폭격을 다룬 소설 『제5도살장』을 쓸 수 있었고, 그 부제로 '소년 십자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래서 나는 오른손을 들고 메리 앞에서 다짐했다.
"메리, 나는 내가 쓰는 이 책이 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오천페이지는 썼다가 내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걸 다 끝낸다면, 내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거기에는
프랭크 시나트라나 존 웨인이 맡을 역은 없을 겁니다. 」 『제5 도살장』 p29
전쟁을 제대로 기억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그에게 친구 부인 메리는 책이나 영화가 전쟁을 영웅주의의 틀에 맞춰 선전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전쟁의 참모습을 전하지 못한다는 깨달음을 준 것이다.
쉽게 설명해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떠올려보자. 이 영화에서 다루는 건 분명히 전쟁이지만,
전쟁은 휴머니티를 드러내기 위한 배경의 일부일 뿐 전쟁의 참상은 그 휴머니티를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써 역할하게 된다. 비단 다른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내 얘기가 무슨 얘긴 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책을 한 권 써서 그 '왜?'라는 질문에 답한다면
아주 위대한 책이 될 거요."
"당신은 그 답을 알고 있소?"
"모르오. 나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책이 나온다면
값이 아주 비싸더라도 사볼 생각이오."」 p30
커트 보니것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은 썩은 사과와 같다. 정신 속에 싹트는 순간 치매환자의 뇌사진처럼 모든 것을 파먹어 들어가서 병들게 하는 썩은 사과!!!
그래서 그는 제대로 전쟁을 겪은 인물들 속에 자리 잡은 곪은 상처(전쟁에 대한 기억)를 소설을 통해
드러낸다.
마더 나이트』의 서문에서 작중인물이자 이 책의 저자인이 하워드 W. 캠벨 2세는 이 책이 고백록임을 밝힌다. 왜 고백록이냐면 자신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자신이 한 모든 행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고, 그에 대한 기록물이기에 이 책은 고백록이 되는 것이다. 독자는 시작부터 기존 전쟁 기록물과 다른 길을 걷는 주인공의 특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육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한 줌 연기로 사라지게 만든 아우슈비츠 소장마저도 자신의 모든 행위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전쟁기간 중 직접적인 살상에 관여한 적이 없는 나치 라디오 선전원인 캠벨은 자신의 모든 행위의 유죄성을 스스로 인정한다.
심지어 자신이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이 보이자 스스로 자신을 단죄하기에 이른다.
이쯤에서 아~ 정말.....'아버지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라고 외친 예수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예수는 저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지만 인간세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요. 약자는
강자가 기르는 개의 개껌만도 못하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상황이 이러하니 커트 보니것이 아무리 진솔하게 에세이에 전쟁 나빠요를 외쳐봤자 어디 바늘 끝만큼이라도 독자에게 그 글이 먹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커트 보니것이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호흡곤란 마저 일으키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왜 소설이라는 틀에 담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어설프게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실제 기록이 담아낼 수 없는 사실 너머에 가려진 한 인간이 느끼는 솔직한 고백, 단 한 명이라도 누군가
실제로 그렇게 고백을 해줬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작가의 희망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전쟁을 다룬 작품들 모두에 그러한 희망이 담겨 있다면 그 어떤 반전 메시지보다 큰 울림을 줄 수 있으련만.........
「"엉뚱한 걸 소중하게 여기지.
그리고 진짜 소중한 걸 너무 늦게 깨닫는다네.
이 세상엔 그럴듯한 이야기가 많지만
내가 진심으로 믿는 걸 말해도 되겠나?"
"말해보게나."
"사람들은 모두 미쳤어. 언제 어디서나 미친 짓을 저지르지.
지각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축복을 받을 걸세."」 p158
모두 다 잘못이 없다고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할 때 난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안다고 말하는 캠벨을 보며, 현재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이념을 앞세워 자본의 논리를 밀어붙이는 정치인들, 나보다 더 못한 사람에게 잔인하지만 겉모습은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내 주변인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나부터 똑바로 잘해야 할 테지만 우선은 내게
나 자신의 실제를 인정하는 것이 먼저가 될 것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 씨>의 대사 '너나 잘하세요'가 아니라 '나부터 잘하세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