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어], [코맥 매카시]
「~운명은 끝내 피할 수 없어.
~운명이란 이곳 세계만큼이나 거대하여 반항자까지도 다 품고 있거든.
너무나 많은 이들이 파멸하고 만 이곳 사막은 너무도 광대하여
우리 마음을 마구 끌어당기지만 사실상 텅 비어 있지.
황량한 불모지일 뿐이야. 사실상 거대한 돌덩어리지.」
[핏빛 자오선] p426
[우리는 우리가 시간의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사실 세상의 길은 그 어디에도 정해져 있지 않아.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의 여행인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시간이기도 하지.
우리는 똑같아.
일시적이고. 수수께끼 같고. 동정받지 못하지.] p586
[기진하여 쓰러져 잠든 동포들의 꿈과 꿈 사이를 건너듯,
희미한 덜걱거림과 희박한 공포 속에서 새벽을 향해 죽어 가며
홀로 감당해야 하는 돌이킬 수 없는 밤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굼뜨게 옮겨 가듯 수레는 삐걱삐걱 나아갔다.] p531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간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죽음이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 화선지에 떨어진 먹물이 종이의 결을 따라 먹물이 퍼져나가듯이 자신의 삶에 궤적을 그려나간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이 그려놓은 궤적의 전체를 볼 수는 없다. 그 전체를 관람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죽음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주관적으로 삶을 살아간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실상 우리는 이미 결말이 정해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나오는 작중인물 빠홈 처럼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갖고 오늘을 살아간다.
여기 빌리라는 소년이 있다. 그는 말을 키우는 부모님 밑에서 눈치 빠르고 똑똑한 동생 보이드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집 근처에서 늑대를 발견한 소년은 그 늑대를 동경하게 되었고 그 길로 아버지의 총과 아버지의 말을 타고 늑대를 서식지인 멕시코로 데려다 주기로 결심했다. 빌리는 머나먼 여정 끝에 늑대와 멕시코 국경을 넘게 되지만 국경을 넘자마자 늑대를 도박 투견을 하는 무리에게 빼앗기고 늑대는 거듭된 투견 끝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소년은 늑대를 직접 총으로 쏴 죽이고 늑대의 주검 값으로 아버지의 총을 도박장 무리에게 넘긴 뒤 늑대를 땅에 묻어 주었다. (늑대를 잃음)
소년은 늑대를 잃은 상실감을 안고 또다시 길고 긴 여정 끝에 집에 도착했지만 이미 부모님은 강도의 총에
죽음을 당한 뒤였고 동생인 보이드만 어렵게 되찾은 빌리는 빼앗긴 아버지의 말들을 되찾기 위해 약탈자들을 추격했다.
그렇게 어려운 우여곡절 끝에 말들을 되찾은 듯했지만 다시 추격해 온 무리들에게 동생인 보이드는 총을 맞고 그런 동생을 마을에 맡긴 빌리는 군대에 자원하려 하지만 심장의 이상을 이유로 입대를 거부당했다.
그 후 빌리는 여러 목장의 일용직을 전전하다가 다시 동생 빌리를 찾아가 다시 함께 길을 나서지만 동생은
그를 남겨둔 채 길에서 만난 소녀와 길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님과 말과 동생을 잃음)
이후로도 빌리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길 위를 떠돌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떠돌던 중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의 유해를 고향에 묻어주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그 과정에서 강도를 만나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말인 니뇨는 칼에 맞고 어렵게 동생을 땅에 묻어준 뒤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폐가에서 온통 만신창이인 상태의 개(빌리 자신과 같은)를 보고는 혐오감에 개에게 돌을 던져 쫓아버린 뒤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깨어나 눈물을 터뜨렸다. (삶의 이유를 잃음)
[국경을 넘어]를 읽는 내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빌리라는 소년의 삶이 결국은 우리네 인간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오늘을 열심히 살면 내일은 더 낫지 않을까라는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품고 현실이라는 뜨거운 불판에 다시 한 발을 내디뎌야 하는 인간에게 운명은 무거운 형구를 내리누르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핏빛 자오선]에서도 그랬고 [국경을 넘어]를 통해 굳이 이렇게 문장을 읽는 내내 비통하고
가슴 아파야 할 정도로 코맥 매카시의 문장은 아프다. 고통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장치이고 거짓된 희망이 정답이 아닌 줄은 알고 있지만 이토록 참혹한 문장이라니.......
책을 읽고 난 뒤에도 너무나 오랫동안 생각을 곱씹게 되었다. 그러다 불현듯 코맥 매카시의 [국경을 넘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질문은 로맹가리가 [하늘의 뿌리]의 작중인물 모렐을 통해 우리에게 하는 말과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의 문구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 그리고 한강의 작품 [바람이 분다, 가라]의 말과 닮아 있었다.
「"절망해선 안되지. 오히려 미쳐야 돼.
폐도 없이 땅 위에서 살아보려고 물 밖으로 배를 내놓고,
어떡해서라도 숨을 쉬어보려고 애썼던 최초의 파충류도 미쳤던 거지.
어쨌건 그래서 인간이 생겨나게 되었지. 항상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 [하늘의 뿌리]
「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p9 [데미안]
[~......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
[바람이 분다, 가라] p342-344
코맥 매카시, 로맹가리, 헤르만 헤세, 한강의 글들을 통해 나는 어쩌면 人間(인간)의 삶은 사람이 되어가는 여정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했다. 살아있는 우리는 우리가 그려온 삶의 궤적을 볼 수 없지만 코맥 매카시가 지금 당장 삶을 포기하고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소설 속 인물 빌리를 통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작가 한강의 작품 속 파란빛이 도는 돌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