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통해 만나게 됐을 때 나는 책을 읽으며 가슴속에서 뜨겁게 솟구쳐
오르는 응어리를 애써 삭혀야 했다. 작중 인물인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의 작품에서 자신의 전 생애를
위로받았던 것처럼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이해받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받는데서 오는 기쁨에 나는 책의 표지에 실린 헤르만 헤세의 얼굴을 보고 또 보고 손가락으로 어루만져보기까지 하였다.
「자네는 다니엘 수도원장님을 재현했을 뿐 아니라
생전 처음으로 나에게 자네 스스로를 완전히 펼쳐 보였어.
이제 비로소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네.」 P442
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문화권에서 창조된 작품이 읽는 행위만으로도 이해와 위로를 전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헤르만 헤세는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해 작중인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간에 오가는 대화를 통해
예술이 인간의 역사에 차지하는 위치를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사라질 존재이고, 변화하는 존재이고, 가능성의 존재지.
우리 인간에게는 완전함도 완벽한 존재도 있을 수 없어.
그렇지만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뀔 때
우리 인간은 참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네. 완전한 것, 신적인 것에 한 단계
더 가까워지는 셈이지. ~자네는 예술가로서 많은 형상들을 만들었네.
이제 정말 그런 형상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면,
한 인간의 형상을 우연사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순수한 형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자네는 예술가로서 이러한 인간상을 실현하는 셈이지 」 P428
작중 인물(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예술이 제도와 문화로 대표되는 이성적 세계가
도외시한 인간을 감성(인간성)이라는 보편성의 세계로 엮는 매개체임을 확인하게 된다. 예술의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예술작품이 주는 감화는 문명과 문화, 국가를 초월하는 힘을 갖는다. 또한 예술 장르는 완전하지 않은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극복의지를 작품으로 표출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신성으로의 접근과 발견을
드러낸다.
「하지만 하느님의 창조에는 균열이 있다. 실패한 작품이든 불완전한 작품이든 간에,
어쩌면 인간 존재의 바로 이 같은 균열과 동경에 특별한 의도가 담겨 있든 말든 간에,
이러한 균열이 하느님의 적이 뿌린 원죄의 씨앗 때문이든 아니든 간에.
그런데 어째서 이런 동경과 불완전함이 죄가 되는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모든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바로 그런 그리움과 불완전함에서 생겨나지 않는가?」 P382
어쩌면 인간의 원죄는 불완전성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이 갖는 본래적 불완전성으로 인해 인간은 끊임없이 본인도 알지 못하는 방법을 찾아서 평생 동안 뭔가를 시도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완전함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의 경험을 전달받고 과거의 경험을 축적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를 위해 타 생물군과는 다른 언어체계를 구축했는지도 모른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작중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작중인물의 대화처럼 인간은 대화를 통해 의사소통[意思疏通]을 한다. 의사소통은 서로 간에 생각이나 뜻이 통함을 나타내는 단어로 이를 위해서는 서로 간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골드문트와 나르치스가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지녔듯이). 계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의사소통을 위해 서로 간에 이해가 필요한 건지 이해를 위해서 의사소통이 필요한 건지우선순위를 알기는 어렵지만 인간이 여타의 생물군과 다른 언어체계를 갖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시키기 어려움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벙어리 냉가슴이란 말이 있듯이 자신의 의사를 타인에게 납득시킬 능력이 떨어질수록 사람은 큰 고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대화능력의 수준을 떠나 갈수록 타자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 힘들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타자와의 불통에서 오는 소외감과 불안은 각종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터져 나오며 그 해결방법으로써 소통을 외쳐보지만 그 말조차도 불통에 막혀 부질없이 흩어질 뿐이다.
과거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사회관계와의 불통에서 오는 개인의 몰이해를 방법론적으로 끌어안았다면,
현대인들은 어디에서 자신을 이해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고향(태생)이 없는 떠돌이들이다.
「이를테면 예술은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 정신과 피가 합일된 세계였다.
또 예술은 가장 감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혹은 순수한 이념 세계에서 시작하여 가장 원초적인 육신의 세계에서
끝날 수도 있었다. 」 P266
「좋은 예술 작품의 원형은실제로 살아 있는 형체는 아니지.
~예술 작품의 원형은 피와 살이 아니라 정신적 인어 떤 것이지.
그것은 예술가의 영혼 속에 깃들여 있는 형상이라 할 수 있지.」 P414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그러한 떠돌이들을 예술로서의 '원형'을 통해 보듬고 위로하며 응원한다.
신성을 간직한 작품이 그 창조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경우처럼 이 작품은 소설문학이면서도 시의 문장보다
더 인간이라는 존재의 총체적 감수성을 아름답고 함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애초 작가의
의도보다 더 큰 원형으로서의 인간에 다가감으로써 모든 인간의 삶의 다양성을 끌어안아 그 속에서 큰 위안과 감동을 선사한다.